수난의 역사

연안이씨(延安李氏)!       여기 오면 이노래가 생각난다

이름 그대로 연년평안(年平)을 상징하는 명문거족의 화려한 명성만 누렸던 것은 아니였다. 

고해고경-藁鞋藁經好-짚신은 짚으로 만들어야 좋다.

실로 가긍할 수난과 풍전등화의 참담한 위기를 만나 어느때는 큰소리 한번 내지 못하면서 숨 죽여 살아 온 고달픈 역정도 없지 않았으며, (藁鞋藁經)결코 위세와 권력에 아첨하여 영화를 누리지 않았다(厭戚拒婚)

함경도 경원땅에서 야인들을 규합한 무력으로 입신한 이성계가 "왕씨고려"를 빼앗아 새로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이나라를 강제통치하는 과정에서 쉽게 따르지 않는 민심을 억지장악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다하여 왕군통치(王軍統治)로 밀고 나갔였는데,이러한 광경은 해방후에도 반복하여 이방원의 후손 이승만과 이기붕이 다시 권력의 맛을 못잊어 거리의 폭도들을 앞세워 민주헌법을 농락하고 대통령자리를 세습하려한 장면과 흡사했던것이다.

공명심과 눈앞의 이익에 들뜬 불량자들을 규합이용 젊은 왕자 이방원은 정몽주등 당대 유력한 지도인사들을 대낮에 암살하고 순순히 따르지 않는 강성벌족을 상대하여 가차없이 재산을 몰수하고 유력자를 죽이거나 왕실의 위엄마저 유린하고 모함하여 적통임금마저 신돈의 씨라면서 폐하고 저항 할 수 없도록 무능한공양왕을 앞세우고 따르지 않는 지도층에 터무늬 없는 모함을 쒸워 벼슬과 재산을 배앗는 일이 예사였다. 

이러한 와중에도 신라 고려를 이어 천여년 굳게 자리 잡아온 우리 연안이씨 역시 그 수난을 면하기 어려웠으니 "고혜고경(藁鞋藁經)"사건은 이같은 터무늬 없는 탄압을 말해 주는 실증적인 사례이다.

권모술수에 능한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경쟁자인 그 형제왕자들까지 도륙하고 왕이 되어 후에 태종이라 불리운 임금이 되었는데 평소에 호락호락하지 않은 연안이씨 춘천부사 이 속(李 續)에게 늑혼(옹주사위삼기로 강혼) 할 것을 요구하자  "짚신은 짚으로 삼아 신어야 하지 않겠는가?"(藁鞋藁經)라는 비유적으로 농담한 것을 트집잡아 모든 문적을 몰수하고 재산을 빼앗았으며 자손3대를 금고처분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등, 당대 귀족을 역적으로 몰아 서민으로 강등시킨 가혹한 처단을 내렸으며 조상에게까지 모욕적인 공박을 주었다. 실록과 고령현부인 비석에 나타난 기록을 참고하면 춘천부사공(李 續)을 극렬하게 탄핵하는 과정에서 특히 심복들을 대거 동원하였는바 그 가운데 조말생과 하연(河演)이 더 악랄하였다. 하연은 곧 부사공의 매제 河泂의 동생으로 사건이후에는 그 형의 처까지 파혼하여 돌려 보낸다. 이런 참담한 와중에서도 이웃에 살던 정의를 잊지못한 원천석(운곡) 성석린(독곡)등 당대 지사와 문신들은 과감히 그때의 상황을 시와 일기로 그리며 남겨 지극한 동정을 금치 못하였다.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자기가 타살한 정몽주의 무덤이 연고지인 영천으로 가지 않고 도중인 용인 연안이씨 묘역입구로 안정하였다는 점도 범상치 않는 일일 뿐 아니라. 선친간에 노관지교를 들어 권력을 잡은 왕에 대하여 고분고분하지 않은 연안이씨 가문의 초연히 아첨하지 않는 태도에 그냥 보고 넘기기 싫었던 모양이다.

야설에 의하면 포은 정몽주(당시 55세)가 선죽교에서 이방원(당시 25세)이 졸개를 시켜 무자비하게 타살한 광경을 목격한 재상 한분(연안이씨라고 전함)이 자신이 타고 가던 교자에 포은의 시신을 거두어 갔다하고 그 상여가 포은의 고향인 경상도 영천으로 방향을 잡고 가던 중 지금의 용인 풍덕천에 이르자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며 영정이 날라가더니 인근 모현 능원리 현재의 묘상에 떨어지므로 할 수 없이 이 자리에 묘를 쓰게 되었다는데 이 자리는 우연스럽게도 연안이씨 묘역입구이며 이러한 기록의 이면에는 이방원의 악랄한 눈을 속이기 위한 궁여지책중 하나였을 것으로서, 그 역사의 이면에는 이러한 곡절이 추상된다.

당대 거유이자 이성계와 상대할 수 있는 지도자 포은 선생의 시신을 고향으로 보내지지 않고 경기근교에 안전하게 모시게 하고 이 위치를 중심으로 재야 인사들의 집결지로 이방원과의 재대결을 위한 의미있는 재포석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비록 이러한 역사의 이면이 역사에 뭍이고 말았지만 뜻있는 당대 인사들의 글에서 간간히 당시의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오백년역사는 왕군수호(王權守護)와 신권신장(臣權伸長)의 갈등을 겪은 역사로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신권이상주의 정치를 향한 일념이 꾸준하게 이어온 역사로 부연되고 있다.오늘의 우리나라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신속히 받아 들이고 독제군주를 탈피하고 개혁국가로 성장할 수 있게 된 바탕역시 포은의 새로운 도학정치를 수호하려는 정치사상에 기초를 두었으므로서 더욱 빨리 성정할 수있는 것이라고 볼 수있다.  

추고컨데 터무늬없는 핑계를 잡아 대가문을 억지 모함을 걸어 금고처분하는 것도 이러한 사건과 무관하지 않으며 자신이 타고가던 교자에 포은의 남루한 시신을 수습한 그 재상역시 연안이씨중 한 분이었다고 원운곡기록에 있었다고하나 그 운곡의 후손이 태워 버렸다하며 기록에 원운곡이 용인 구수동구 시미리 쌍훼나무마을 어귀에 머뭇거리며 당대 의기지사와 교유하며 남긴 글에서 보더라도 당시의 민감한 상황속에서 노출되어서는 않될 이러한 기록을 재대로 남긴다면 화를 당할 우려도 있어 구전으로 전하는 일외에는 추측일 뿐이다. 당시상황으로 보아 정몽주의 시신을 누구하나 용기있게 수습할 수 있었던 의인이 드물었고 그 시신조차 누구의 땅에 보안하는냐하는 문제도 서슬퍼런 이방원의 세도하에 생명이 좌우되는 문제이므로 아무도 이를 감행할 용기가 없으리라는 점은 지금이라도 역력하게 상상할 수있다. 지금도 누군가에 의해 해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역사의 기록에 생생히 남아 있다.

 

성독곡(成文景公 石璘)의 文集에 高靈郡夫人金氏의 輓詩가 실렸는데 김씨부인은 춘천부사공의 모친이다.

宅近常同井 (택근상동정) 우물물을 함께 길러 마시며 가깝게 이웃하여 살았고

門高幸接葮 (문고행접단) 사돈지간 어려우나 벼슬길 같아 왕래는 깊었다네

有無能共里 (유무능공리) 부귀빈천 가리지 않아 있고 없음을 차별 않으니 

慈惠最宜家 (자혜최의가) 언제나 은혜롭고 자비스러움이 뛰어난 집일세

光景隨流水 (광경수류수) 빛나는 그 모습은 흐르는 물처럼 평탄하더니

音容惜洛花 (음용석낙화) 애석타 그 음성과 그 자태는 꽃잎처럼 살아지네

百年偕老願 (백년해로원) 내외분 백년해로를 모두들 바라고 바랐건만

丹旐夕陽斜 (단기석양사) 붉은 깃발 석양빛에 아득히 기울고 마는 구나

   (계속)   

투수남행 (投綬南行)

극악한 압제와 모질고도 끈질긴 질곡의 세월을 보낸 흔적도 아직까지 남아 있고,

이성계 이방원의 아들 손자가 권력을 악착스럽게 전단해온 500년비운의 역사에서도 오로지 인간다운 역사에 충실하기 보다는 권력에 아첨하며 살아아 온 풍조가 휩쓸었고, 이러한 사실을 온갖 미사려구로 호도(糊途)하는 글들이 넘쳐나는 풍토에서 그나마 모진 세파를 지혜롭게 헤어나며 인간다운 기백과 정신을 이어 오늘의 떳떳함을 보여주신 조상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이 조선땅에 매우 드물것이다. 이와 견줄만한 사연이 다음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別坐 (李 垙)은 종동서 아우인 燕山君의 妻家가 거창愼氏인 점이 주목되는바 이미 연산의 사람됨을 알게 된 공은 그를 될 수 있는 한 멀리하기 위하여 벼슬길을 멀리한다.

공은 스스로 호를 半聾齋라 하여 벼슬길을 스스로 삼가 하시고 상의원 별좌 직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佔畢齊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寒喧堂 金宏弼과 同榜 生員을 하신 기록이 있다.

역사기록으로 볼때 연산군은 점필제 김종직 문하의 많은 선비를 모함하여 죽인 무오 갑자사화(戊午 甲子士禍)이후부터 용인 구수동에 은거하여 지냈다. 폭군 연산군이 누차 불렀으나 스스로 반농제(귀먹은 이)라는 자호를 쓸 정도로 못들은 척하여 지내시다가 용인에서 돌아 가셨다. 거창신씨 일가가 전부몰락하는 상황에서 공 내외분은 오로지 학문조차 폐하고 선영하에서 유유자적하시다가 한양 100리 밖 조상묘하에서 일생을 마치신 것이다.  이러한 기개는 조선왕조가 망하는 날까지 이어지며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한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자부하고 있다.

한편 연산군의 장인 신승선과 별좌공공의 장인 신승복과는 사촌간이다. 그러나 별좌공(垙)은 연산군과의 처가로 종동서간이지만 한편 친가로는 바로 아래 아우이신 연성군(坤)은 연산군을 몰아내어 그글 귀양지까지 안치시킨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서 중종반정을 완벽하게 성공시킨 공신이 되었는 바 바로 아래 친동생되시는 분이 졸지에 공신이 되는 이러한 와중에서도 벼슬에 오르는 길보다는 초야를 선택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특히 별좌공(광)의 차자인 교위(위수)공은 교위직(內禁衛彰信校衛)을 스스로 버리시고 낙남(落南)하여(投綬南行) 처음에는 예천금곡에 덕천당(德川堂)을 세우고 후세교육에 힘쓰시는 한편 안동 절강 무릉(浙江 武陵)에 이르러 무릉정이라는 정자를 짖고 당시 영남일대의 사림들과 교유하면서 매촌(愈), 율리(熹), 눌헌(應),등 삼형제를 퇴계문하에 보내어 훌륭한 도학을 잌혀 후일 나라의 위기에 동량이 되도록 하였다.

불행하게도 임진왜란이란 불가항력적인 전란에 임하여 수령들이 겁을 먹고 버리고 간 예천고을을 당시 용궁현감에 계시면서 예천성을 수성하였지만 재차 삼차 공격을 해온 적과의 예천성전투에서 전 가족도 함께 몰사하는 변고를 당하였을 뿐 아니라(매촌공) 한편 왕을 호종하던 차에 삭녕지방에서 적을 만나 항전하시다가 순절하신 분(율리공), 의병을 모집하여 경상도지역을 방어하시는 등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고을과 나라를 지키는 데 힘쓰셨고(눌헌공), 전란이후에 겨우 수습한 가솔을 거두어 지금의 예천 송곡에 처음으로 자리를 정하였다

校衛公 (李葳壽)

자는 華甫이다, 성종 22년신해(1491)생이시고 벼슬은 內禁衛彰信校衛로 시작하였으나 이를 버리고(투수-投綏) 남하하여 慶北 醴泉 沙谷에 자리를 잡았다.

공께서는 용인 九水洞에서 공명을 초월하여 선영을 받들고 사시는 부친 별좌공 (垙)이 중종 6년1511)에 돌아가시자  창신교위의 벼슬을 버리시고 남하하여(投綬南行) 경상도 예천 사곡(현재 경북 예천군 호명면 송곡동)에 은거하신 것이다.

부친이신 별좌공(垙)께서 이미 점필제(金宗直)의 문하로서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어 온 만큼 영남성리학파에 대해 호감을 갖이시고 세분의 아드님과 사위분들은 모두 퇴계(이황)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고 이분들은 모두 퇴계문인록에 올라 있다.

공은 조부이신 연안군과 당시 숙부이신 연성군(坤)은 물론이고 이시애란평정공신이신 안양공(장말손)공의 맏 손서로서 당대에 권력의 중심에서 영달을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사화와 선비들의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여 부친의 유지를 따라 영남으로 남하하신 일은 참으로 현명한 하였다고 사료된다.

梅村 공(李 愈)>

자는 子欽이요 호는 梅村이다. 중종 17년 임오(1522)생이시다. 명종 2년 정미(1547)년에 栗里, 訥軒 동생분과 함께 생원으로 함께 生員進士에이르시고 삼형제가 같이 퇴계문인으로 나아갔다.

퇴계선생의 도산문현록(陶山文賢錄)에 기록하였으되 “이유는 자 자흠이요 호를 매촌이라 하는데 연안인(延安人)으로 醴泉出生이다. 가정 임오에 형제가 함께 진사가 되고 퇴계문하가되었다. 4개의 읍을 다스려 치적을 쌓고 임진년에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부임하자  군사를 모아 외적에 대항하였다.

난리를 만나 뿔뿔히 흩어지는 민심을 수습하고 겨우 수백에 지나지 못하는 군사이지만 용궁 정재령(政在嶺)은 국가의 주요 보급로로서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이 막중한바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임하여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雪泲爲誓衝冒矢石) 다수의 적의 목을 베고 신속하에 움직일 수있도록 보급로를 열어 차질이 없게 하였는데 다시 예천의병장으로 토적(土賊)을 잡아 一郡이 일단 안정을 취할 수 있게 질서를 잡아 나갔으며 이로서 경상도 안찰사인 김수(金晬)는 공에게 진충보국한 공으로 포상하였다“ 하며 이어 한편 기록에는 ”공의자는 자수인데 첨추(僉正벼슬과 中樞府使를 지내신)仁文公의 曾孫으로 수를 72세라“ 이록한바 있고 또한 ”泰川縣監 재임시에 廉使 漢陰(文翼公 李德馨)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여 이를 주청하자 임금은 귀한 신발과 의상(表裏衣襨)을 하사하였다”한다. 그리고 “임진 5월 경상도 安集使 伯巖 金訒(김인)이 경상도 각읍을 지킨 장수들에 대해 장계를 올렸는데 前縣監 李愈로하여금  醴泉을 지키고 土賊을 섬멸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였다.

國朝實記에도 “용궁현감 이유(李 愈)는 적병과 더불어 교전하여 많은 수급을 노획하였으며 경상감사 백암 김인이 포상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醴泉邑誌(懶隱 李東標찬-숙종때 인물 솔무덤에 유적이 있음)에는 ” 李愈는 義兵將으로서 적과 싸워 토멸하고 마침내 陣中에서 돌아가시니 시신을 찾을 수없어 그의 관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고, 朝鮮 名臣錄에도 ”이유의 호는 매촌이요 위수의 아들이다. 퇴계문인으로 임진란에 적을 참획하여 공을 세웠으며 마침내 진중에서 돌아가시였다는 기록을  이동표가 이를 장계하였다.

공은 간당들만 가득한 조정에 입사하지 않으시다가 명종 22년 정묘년에 在野人材를 천거하라는 교지에 따라 늦게 벼슬길에 오르셨는데 4개읍을 다스렸는데 태천현감으로 재직시에는 한음(이덕형)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는 장계를 올려 임금으로부터 의복과 신발(表裏衣襨)를 받았다.고 하였다. 기록은 중복되지만 아직 정사에 기록이 누락되어 부득이 여러 지료를 모아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 증명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며 이러한 기록은  세첩보유( 눌운 이병화 편)에서 참고한 것이니 앞으로 공의 기록은 사실에 상당한 기록으로 유의하기흘 바라는 바이다.

무릉정 현판을 걸때 시를 쓰셨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暮厓細路覓幽棲  谷遼炯深樹影低  何處桃園花從水  武陵島外唱金鷄

栗里公과 訥軒公 두분 아우님,그리고 鄭元忠 玄璞 笑庵姜士弼 邊克寧 鄭元沆 金訒 鄭元黙 李景嶔 曺繼益 權景龍 鄭元健 聚遠堂 曺光益 洪秀民 曺希益 蒙霽  李安道 芝山 曺好益 權景虎 曺謙益 과 더불어 講親契를 세웠는데 공이 강친계의 계주시며 이분들은 姨從兄弟와 姨從媒胥의 사이였다.

강친계첩의 쓰인 제목의 싯구는 이러하다.

思功謂陽日  歡深荊樹春 百年期莫逆  相與講親親

이 강친계는 선략장군 (선략장군 장중우 부 연복군 장말손)의 외손자이거나 외손서들로서 공과 공의 두 아우분을 합하여 수물한분인데 게첩과 계첩에 시문을 올려 세세연년토록 친분을 가지고자 하는 약속을 서명한 것으로 모양은 정방형 석자크기로 네모난 기름먹인 한지 한 장에 올려저 있어 오늘 날 까지 보존되어 왔다. (*내가 이글이 실린 강친계첩을 모고 본 그대로 적지만 글솜씨가 부족하여 다 못 적는다, 이관희)

공은 明宗이 정묘 6월에 붕하여 넉달이 지난 10월에 장례를 지내고자하는 왕대비의 고집을 꺾는 상소를 올려 마침내 장일을 바로잡은 일은 율곡집에 있는 바 율곡(이 이)도 공이 이를 분명하게 밝혀 대왕대비 윤씨의 판단을 옳게 하므로서 조정대신들 조차도 미처 생각지 못한 잘못을 바로 잡았다는 기록은 공이 성리학 이론에 매우 투철하였음을 입증하는 면을 보여 준다.

공의 묘소는 예천호명산 선고비 묘하 동록에 모셨으며 배위는 문화류씨로 묘소는 함께 모셨다.

공의 후손은 1녀 진사 李淸(진주인 자 海益 녀 柳澤 진주인 문정의 여 金繼光) 를 두시고 후일 判事(德承 생부 應 묘 안동 임북 세천산 눌헌공 영 후록)공을 계자하였으나 판사공은 三녀와 서자 三인을 두셨는데 서자인 英男공이 아드님(碩) 한분을 두셨으나 族譜상으로 이어 오지 못했다.  후일 을사,갑술,계유보 수단시에 누락되었던 것을 경신보 수단시에 광주상애곡(廣州桑厓谷)에 族人 이 거주하는데 공의 후손(석)과 같은 단자를 보소에 내었기로 이를 증명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돌려 보냈더니 후에 교정공(弘老)의 후로 투탁하였다고 하나 족보와 이조실록에 기록을 비추어 교정공 후손은 불명하다. 사평공파의 휘 碩이 곧 그 사람들이다.

栗里 공(李 熹)*참고자료 율리공 글 모음
    

자는 자수 호는 율리이다.중종 27년 임진(1532)생이 시고 명종 16년신유(156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선조 7년갑술(1574)별시 문과에 올라 상주교수, 경상도사,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에 이르고 태상첨정을 지냈으며 퇴계문하에서 수업하엿다는 기록은 퇴계언행록에  있다. 도산문현록(陶山文賢錄)

퇴계선생 문집중에 이자수에게 보낸 편지가 두통있는데 퇴계선생은 성리학에 대해 매우 간곡하게 설명하신 흔적과 안부를 교환하신 정감어린 내용에 후세인들에게 매우 깊은 감동을 준다.

공은 선조 3년 신미(1571)12월 퇴계선생 기세시에 제문을 올렸는데

“...실로 선생은 공자와 기자 이후 도학을 더욱 세롭게 다듬은 진정한 1인자로 추앙하여야한다”는 극찬을 시작으로 퇴계선생의 공적을 지극히 높힌 바 있어 후일 중원의 학문일지언정 동방에서 비로소 대성을 이룬 퇴계선생의 공적을 올바르게 표현한 자강자주적인 표현의 효시(自疆自主的 表現 肴示)가 된 것이다.

상주향교 도선생안(道先生案)과 국조방목(國朝芳目)에도 위와 같은 내용이 반복하어 기록하고 있으며, 공은 임진란에 임금을 모시고 북상하던 중 삭녕지방에 이르러 적을 만나 중과부적으로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는 기록도 이상의 서면에 함께 올라있다.

참으로 퇴계는 그를 알아주는 제자를 많이 두었지만 그중 공과 같은 제자가 천명을 극복하여 오래하였더라면 더욱 그 빛나는 명훈을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렸으리라 매우 한탄스럽도다..

묘소는 매촌공 묘하에 모시고 배위는 원주변씨(원주변씨 부는 응녕 조 참봉 관 증조 필대 외조 문억형 본 감천)이며 묘소는 공의 묘소와 같이하였으되 상하분이다.  의성김씨 연방세고(義城金氏 聯芳世考)에 보면 능천서당을 함께 세웠다 하였다.

능천서당(能川書堂)은 공께서 예천 금곡에 계실 때에 남악공(김복일)과 같이 능천서당을 이르켜 후학을 가르켰다고 하는 기록이 남야집(박손경)에 있다, 이 남야집에 기록하였으되 “금곡 북쪽에 옛 덕진숙사가 있었는데  여기에 글은 첨정공이 짖고 글시는 남악공이 썼다“하였고 남악공 자손이 이것을 오늘에 이르기 가지 보관하여 왔다는 요지로 기록을 하였다.

동국씨족고에 “..(앞에 중복기록 생략) 배위 원주변씨가 무자하여 재종질 북백공(昌庭)을 어릴때부터 길러 왔고 후사를 마낄려고 하던차  임진란이 일어나고 공께서 뜻밖에 일을 당하여 돌아가시자 북백공은 3년의 상을 입고 양자의 예를 다하였으며 갑오년에 도 원주변씨께서 돌아가시니 북백공이 교위공선영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예를 올렸다고 하였다.

식산집(이만부-李萬敷)에 가정전례로 알려진 글을 인용하면 "후사까지 부탁하시던 족부 첨정공의 일로 상심하여 직접 시신을 수습하여 모셔 오고 선고묘하로 장례를 지내고 3년상을 입었으나 장차 후사문제를 고민하였으나 다시 친가로 환원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용주 조경이 천한 북백공 신도비에도 남아 있다.

생각건대 식산집에 공의 제사를 모실 사람을 종인이면 누구나 좋겠다고 하면서 북백공이 이를 정하고 스스로 파양하엿다는 기록은 다소 생각해볼 문제다. 첨정공은 순절직전까지 자식이 후사가 없어 북백공 (창정)을 양자로 미리 정하여어릴대부터 길러 왔던 것이 기록에 분명하며 공이 순절하신 임진년부터 그 다음해인 갑오년에 숙인 원주 변씨께서 돌아 가셨는데 11년이 지난 을사보수단시에 첨정공은 후사가 없는 것으로 되었으니 이는 첨정공 후사가 확실히 북백공이후로 단절되었음이 ,더 이상 논난의 여가 없는 것이며 후일 북백공의 손자이신 관찰공 (근곡 이관징)께서 친히 호명 송곡 종택에 오셔서 사당을 짖고 제향을 드린 바 있고 또한 첨정공의 필적이 동애공(浹)사손의 집에 보관되어 왔다는 사실등을 참고해 보면 첨정공은 한성에서 사시던 마을이 율리이며 피란처이던 문경청화산 율수라던지 한성 서문밖 서강의 율도등을 관련지으면 첨정공의 호와도 관계가 없다하지않을 수 없을 것이니 첨정공의 자손은 북백공이 스스로 철양함으로서 그 후대 사손이 없게 되고 연안이씨 종인이면 아무나 대를 이어 제사를 모시게 했다는 것은 당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도리이며 이로서 족보상에 무후로 된 것이 틀림없다.

공이 이조좌랑시에 任百英, 柳希規, 李熹, 沈源河, 崔濂, 閔善, 朴以容, 柳凞緖 등과 더불어 여덟첩 비단평풍에 각기 시를 지어 친목을 결의한 병명계(屛銘契)가 있다. 병풍에 올린 시귀를 살펴본다.     

共 遇 祥 刑 世 「서로 만나 세상을 본받으니 반갑고」

同 爲 大 理 官 「다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였네.」 

金 蘭 成 勝 會 친구우정  나누는 오늘의 잔치에

樽 酒 得 團 欒 「술잔을 높이 들어 더욱 다짐하세나」

要 解 三 年 旱 「공부 쌓던 힘든 세월 비로소 알겠구려.」

何 妨 一 日 歡 「오늘하루 즐긴들 뉘라서 어찌 하리」 

異 時 相 憶 處 「오늘 말고 다른 날 서로 보고 싶을 때는」

留 列 短 屛 看 「해어지며 나눈 이 평풍을 바라보세나   

안동 절강 武陵亭에 간판을 올릴 당시 지으신 싯귀

島下淸江江上棲  繞原紅樹自高低   纖埃不起房櫳靜  啁哳聲聲夜半雞

최근 입수된 자료에 의하면 공은 대왕대비가 불교에 대한 편애로 인하여 국가기강이 문란해짐을 비감하여 상소한 자료가 발견되었기로 별도로 이 자료발간을 위한 작업을 추진중임을 첨언하며 공에 대한 기록이 이외에도 당대 유명한 사대부들과의 교유한 기록등과 특히 퇴계선생과의 사제간 주고 받은 편지내용등은 매우 흥미진진한 것으로 이오에도 무수히 많아서 이루다 적지 못함이 아쉽다.

 訥軒 공(李 應)

자는 子期 號는 訥軒이다. 중종 32년 병신(1536)년 생이 시다. 선조 3년 경오 (1577)년에 사마시에 오르고 선조 8년을해에 수천으로 통례원인의에 오르시였다.매촌공 율리공 백중형과 함께 퇴계선생문하에서 수업하셨다. 도산문현록(陶山文賢錄)

도산문헌록에 “공은 매촌 율리공의 아우이시며 벼슬을 버리고 안동 무릉도 에 복거하여 김약봉(극일) 김학봉(성일),황해월(여일),이몽제(안도),김운천(용),손삼성재(흥례),등 당대 선비들과 더불어 시읇고 글을 짖으 문장을 닦았다” 하고

양양지(양양지)에 “공은 예천 사곡에 계시던 중 늦게 안동절강강상에 도화곡에 작은 정자를 이루어 무릉이라 편액을 달고 지내셨는데 칠언절구 일수를 남겼다”.

당시 무릉정에 액자를 걸면서 지으신 싯귀

幽居自分一枝棲  松下茅簷不剪低  棊局罷來無箇事  更呼童子護雛雞

이뿐 아니라 당시 여러재사들과 주고받은 싯귀가 부지기수이다.

임진년을 당하여 매촌공은 예천에서 율리공은 삭녕에서 변을 만나 돌아가시고 공게서도 전쟁이 긑나던 그해 정유년에 예천송곡에서 세상을 버리시니 아드님 사고공(덕창)이 절겅리에서 예천으로 거처를 모두 옮기게 된 것이다.

“절강 백여리에 전쟁의 소용도리가 지나가니 마침내 사람의 종적이 간데 없다“하는 글을 어느 시인이 읊은 기록을 보았다.

   浙江百餘里一區 雲物管領無人處

을사년(1905) 봄에 공의 운손(雲孫-9세손이후의 자손)(炳華)公이 嗣孫(炳奎)공과 합의하여 무릉정을 사곡촌 후봉 건지산밑으로 옮기는데 편액은 당대 명필 해사(海史-김성근)가 썼다. 편액의 글씨는 미양궁체(米羊宮體)이다.

柳田園(道獻)이 重建記를 쓰니 이르기를 “士君子(사군자)는 마땅히 그 스승을 보아 그 행처를 짐작하는 것이라 하더니 退溪先生의 弟子다움에 있어 뛰어남이 첫 번째로 訥軒 李先生을 두고 한말이라 할 것이다.“ 하니 공이 浙江上 桃樹谷에 亭子를 짖고 當代名儒들과 함께 토론하고 詩書를 논하여 交遊하였으며 임진란을 당하여 伯仲二公과 더불어 나라를 위하여 충심갈력하신 바는 후세에 널리 알려저 있으매 이제 황량하던 그 자리를 떠나 9세손 愛吾窩公(鼎基)의 명에 따라 雲孫(炳華-스스로 號를 訥雲이라함)가 嗣孫 (炳奎)와 합의하여 고향땅에 새로이 이르켜 세운 모습을 보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하였으며 눌헌선생의 의표를 본받아 자손만대에 이어 가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上樑文은 十一世孫 訥雲公(炳華)에 의하여 올려 젔다.

● 병란수공 (兵亂殊功)

나라의 위태로움을 당하여 일신의 안녕을 기꺼히 버린채 분골쇄신 피흘려 나라를 지킨 역사적 사실도 뚜렸하다. 

 이정구(李廷龜)

1564(명종 19)∼1635(인조 13).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 또는 보만당(保晩堂)·치암(癡菴)·추애(秋崖)·습정(習靜). 세조 때의 명신인 석형(石亨)의 현손이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던 현령 계(啓)의 아들로,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문장가문에서 출생, 가학을 통하여 성장하였다.
유년시절부터 비범한 재질을 보이기 시작하여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 南山詩〉를 차운함에 놀라운 표현이 있었고, 14세 때에는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22세에 진사, 5년 뒤인 1590년(선조 23)에는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가 되었는데, 1593년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을 강론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것이 《대학강어 大學講語》로 간행되었다.
한편, 중국어에 능하여 어전통관(御前通官)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의 접대에 정부를 대표하여 활약이 컸다.
34세 때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의 서울에 가고, 다음해인 1598년에 명나라의 병부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임진왜란이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무고사건을 일으키자, 〈무술변무주 戊戌辨誣奏〉를 작성하여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그뒤 대제학에 올랐다가 1604년 세자책봉주청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하였고, 중국문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100여장(章)의 《조천기행록 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그의 능력이 왕의 신임을 받아, 그뒤 병조판서·예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생애는 어디까지나 조정의 관리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으므로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이상과 이문화국(以文華國)의 관인 문학을 성실히 전개해갔다.
이 점에서 그는 정통적인 사대부문학의 전범(典範)을 보인 셈이다. 이 때문에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이식(李植)·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의 문장에 대해서 명나라의 양지원(梁之垣)은 호탕, 표일하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미적인 효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하였으며, 장유도 그의 재기(才氣)를 격찬함과 아울러 고문대책(高文大冊)의 신속한 창작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정조도 그의 문장을 높게 평가한 바가 있다. 이러한 평가들은 그가 집권층의 순정문학(醇正文學)을 대변하면서 변무주를 계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나온 것들이다.
그의 문학은 한편으로 선린외교에 있어서 문학이 가지는 공용성을 십분 발휘한 것으로 일단의 의의를 갖지만, 문학 자체의 독자적 영역을 넓히고 진실된 감정과 사상을 처리한다는 면에서는 다소간 미흡한 점이 있을 것이다.
시문집으로는 그의 문인인 최유해(崔有海)가 편간한 《월사집》 68
풍신수길에게 보낸 월사공의 격문
松田 京鍾(판사공 28세손)

1502년(임진년) 4월에 일본은 15만 대군을 선봉으로 부산에 침입하여 부산성을 비롯하여 서울, 평양성, 함경도에 이르기까지 짓밟아 왔던 임진왜란은 1597년 정유재란까지 7년에 걸친 길고도 처참했던 큰 난리였다.
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사는 왜군에 화의를 청하고, 싸우려 하지 않으나, 우리 군사들은 의병들과 함께 기세를 올려서 남쪽으로 밀려온 왜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풍신수실이 두 번째 침략을 일으켰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풍신수길에게 위협하는 격문을 보냈다.

[爾年已過六十餘歲, 壽命幾何, 爾子未滿十齡, 孤弱何悖, 聞各島之酋俱覘爾隙, 將爲復讐報怨之擧, 蕭牆禍起一朝諸島有內變, 卽 淸正諸將 各思爲王, 豈肯久居於爾何哉, 將來又豈肯居, 爾子之下哉]

이를 해석하면,

[네 나이 육십여세를 지났으니 네 수명은 얼마나 길겠는가? 네 자식은 아직 열 살이 채 못되었는데, 너 한번 죽어지면 외롭고 약한 것은 누구를 믿어 의지한단 말인가? 들으니 섬마다 왜 추들은 제각기 너의 틈을 엿보아 복수 보원하는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더라. 집안 속에서 화가 일어나 일조에 내변이 생긴다면 가등청정 등 모든 장수들은 제각기 왕이 될 꿈을 꿀 것이다. 어찌 네 밑에 오래 있을 성 싶으냐. 또다시 장래에 네 자식 밑에 신하노릇을 하고 일을 할 성 싶으냐?‘

이 글은 고양 게넘이에서 구사일생을 해가며 의주로 임금을 호종했던 월사 이정귀공이 지은 격문이었다. 자식을 죽인 뒤에 가책을 받아 밤마다 아귀한테 쫒기고, 천변지이를 만나 공포 속에 떨고, 평양 대패 후에 과대망상의 큰 꿈이 깨져버린 도요토미는 이 기막힌 격문을 읽자 손이 떨리고 마음이 흔들려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명문으로 지어진 진실한 글은 도요토미의 경우를 그림같이 그려 놓았다.
월사 이정귀공이 지은 격문 한 장은 마침내 비수보다도 더 날카롭게 왜추 도요토미의 급소를 찔러 단판에 쓰러뜨려 버리고 말았다. 권 22책이 전한다.

 

이광정(李光庭)

1552(명종 7)∼1627(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덕휘(德輝), 호는 해고(海皐). 정언 주(澍)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0년 교관(敎官)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1년 승문원정자·사관(史官)·시강원설서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에 선조를 호종(扈從)하여 정언과 지제교(知製敎), 예조·병조의 좌랑을 지냈고, 이듬해 환도 후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을 도와서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어 지평·병조정랑·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이조·예조·병조의 정랑, 동부승지 등을 지낸 뒤 이조·예조·병조의 참의, 좌승지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접반사로서 명나라의 부사였던 심유경(沈惟敬)을 만나러 갔다온 뒤 호조참판이 되어 군향(軍餉)을 정리하여 바로잡는 데 힘썼다. 이어서 공조참판을 거쳐 1598년 접반사로서 명나라의 제독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을 다녀온 뒤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헌하였다.
1599년 호조·공조의 판서를 거쳐 한성부윤이 되었으며, 1601년에는 지중추부사로서 청백리에 뽑혔다.
1602년 예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고, 주청사(奏請使)로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책봉에 대한 고명(誥命)을 받으러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계되고, 판돈녕·판의금을 거쳐 예조·이조의 판서가 되었다.
1604년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어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고, 뒤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부원군(府院君)이 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호조판서로 제수되었으나, 그당시의 정치상황이 어지러움을 보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공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626년(인조 4)에는 개성유수가 되었다.
이때 그곳의 인심이 매우 탐리(貪利)하여 이를 개혁하는 일을 단행하다가 마찰이 생겨 해직당하고, 기로소(耆老所)로 들어갔다. 정묘호란을 당하여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였으나 병으로 죽었다. 인품이 근검하고 신중하여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았다.

이호민(李好閔)
1553(명종 8)∼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남곽(南郭)·수와(睡窩). 연안군(延安君) 숙기(淑琦)의 증손이다.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되고, 1584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5년 사관(史官)으로 발탁되고 계속해서 응교·전한을 역임하였으며, 집의·응교를 겸하였다.
1592년 이조좌랑으로 임진왜란을 만나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가 요양(遼陽)으로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상호군(上護軍)·행사직(行司直)을 거쳐, 1595년 부제학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전담하여 초안하였다.
1596년 참찬관(參贊官)을 거쳐 1599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예조판서로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고, 대제학·좌찬성을 지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그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의 구별 없이 장자를 옹립하여야 된다는 입장론(立長論)을 주장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입장론을 내세웠다. 공을 세운데 대하여 포상하려 하자 〈고부시공로사차 告訃時功勞辭箚〉를 올려 이를 사양하였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었고, 1614년 정온(鄭蘊) 등이 영창대군 살해에 대한 항의를 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자, 〈청환수정온보외차 請還收鄭蘊輔外箚〉를 올려 이들의 방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정인홍(鄭仁弘) 등의 원찬론(遠竄論)에 봉착, 7년간 교외에서 대죄(待罪)하였다. 인조반정 후 구신(舊臣)으로 우대를 받았고, 죽은 뒤 청백리에 올랐다.
문장에 뛰어나 임진왜란 때 왕명으로 각종 글을 많이 작성하였으며, 그가 지은 교서(敎書)의 내용이 간절하여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문장보다는 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의주에 있을 때 적의 수중에 있는 서울을 삼도의 군사가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 〈용만행재하삼도병진공한성 龍灣行在下三道兵進攻漢城〉은 절창으로, 널리 애송되었다. 지례(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오봉집》 16권이 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이시백(李時白)

1581(선조 14)∼1660(현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연평부원군 귀(延平府院君貴)의 아들이며, 시방(時昉)의 형이다. 성혼(成渾)·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23년 유생으로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2등으로 가선계(嘉善階)에 오르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가 되어 이천으로 달려가서 향병을 모집하여 길목을 지켰으나, 이괄이 다른 길을 택하여 곧바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안현(鞍峴)에서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반란군을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수원방어사가 되어 병마 3, 000을 훈련시키고, 유사시에는 십장기(十丈旗)와 방포(放砲)를 신호로 모이도록 하여 정묘호란 때 병마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하기도 하였다.
1629년(인조 7) 삼수미(三手米)를 국고에 수납하는 데 태만하였던 죄로 관직을 떠났으나, 곧 판결사가 되었다가 양주목사로 나아갔고, 강화유수가 되었다.
1633년 병조참판이 되고, 1636년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왕이 불러들여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를 겸하였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영입하였으며,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하였고, 다음해 공조판서에 승진되어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1638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척화신(斥和臣)이라 하여 아들 유(愉)를 심양(瀋陽)에 볼모로 보내게 되자 대신 서자를 보냈다가 2년 뒤 탄로되어 여산(礪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
다음해에 풀려나서 총융사가 되고,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곤궁에 처하였으나 왕의 신임으로 추궁을 받지 않았고, 이어 한성판윤과 형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고 원손이 어려 인조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세자로 삼을 것을 바랐고, 중신들도 그러기를 희망하였으나, 그는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46년 다시 병조판서가 되어 휴가를 받아 공주로 성묘를 가던 중 호서에 토적이 날뛴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돌아와 스스로 토벌할 것을 자원하여 군사를 이끌고 달려갔으나 이미 토평되어 그대로 돌아왔다.
1649년 인조가 불러 술을 대접하고, 또 세자를 소개하면서 세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이분을 팔다리처럼 하니 너도 뒷날 나와 같이 대접하라.” 하며 위로하였다.
그해 5월 효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좌참찬이 되고, 1650년(효종 1)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다음해 김자점(金自點)의 모역사건이 일어나자 아우 시방이 그와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자 도성 밖으로 나가 조용히 지냈다.
1652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를 다녀와서 조석윤(趙錫胤) 등이 언사(言事)로 견책을 받자 이를 신구(伸救)하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에서 떠났다.
그러나 바로 좌의정에 이어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지고, 1655년 영의정에 임명되자 다시 벼슬에 나왔다.
1658년 김육(金堉)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하였고, 다음해 효종이 죽자 윤선도(尹善道) 등이 능을 수원에 정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그는 그곳이 교통이 빈번하여 적합하지 못함을 들어 여주의 영릉(寧陵)을 택하도록 하였다.
그는 일곱번이나 판서를 역임하였고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으나, 청빈하여 빈한한 선비집 같았다 한다.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조익(趙翼)과 교유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수장충혼(水葬忠魂 快葬魚腹)

동해바다에 배를 갈라 창자를 뿌리였건만 조국을 향한 충정을 해아리는 자 없고

이엽-李曄은 강호공의 후손으로 억복(億福)의 장자이며 용인 하동촌 출신이다.

무과급제로 금성현령을 지내더니 임진왜란을 만나 전라좌병사 소속 우후로 참전하여 한산전투에서 가등청정에게 사로잡히자 왜의 본영까지 납치되었다가 탈출하는 도중에 추격을 받아 해중에서 스스로 배를 갈라 자결하며 바다로 떨어졌다.

이 기록은 서애 유성룡의 단구록(丹舊錄)과 강항의 간양록(看羊錄)에 있다 한다.(1694년(숙종20년) 갑술보에는 불록이나 1813년 계유보에 기록을 근거로하여 자료를 살펴 본즉 서애(柳成龍)공은 한(漢)때 이릉의 고사를 인용하여 농서대장부(隴西大丈夫)의 기개를 높혀 그 충절을 기리는 글을 정성을 다하여 기록하였고, 존경록에 공의 현손 세온이 가져온 고지(古紙) 한통을 근거로 자료를 상고하였다 하며 위 기록과 아울러 강항(姜沆)이 간양록에 공을 위한 칠언절구를 남겼더라.

東海茫茫萬里長   將軍何事自沈忙

殺身己快葬魚腹   埋骨無勞願首陽

七里灘解千古咽   九嵐山色百年荒

君間漢代李都衛   國士心甘拜大羊

 

내몸 흔쾌히 던저 어복에 장사 지냄이여

뼈 묻는 수고 없이 만고충절 지켰구려.

그 옛날 신라 박제상을 기리는 망부석아

오늘도 안타까히 허망하게 기다린 백년

한나라 이릉장군 생각마저 돋는 구려

바다를 향해 삼가 허리 굽혀 절하노라


훗날 100여년이 지난후 공의 현손 세온(世溫)이 가저 온 고지의 내용을 상고하면 아래 와 같다.

“나의 고조부 엽(曄)은 임진란 중에 전라좌병(사)의 우후(虞侯)로서 한산도 싸움에서 패하여 왜장 가등청정에게 잡히니 청정이 항복하라고 협박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으니 관백(關伯)에게 압송하여 대장의 집에 머물게 하고 후하게 대접하면서  상으로 비단등을 많이 주었다.

공은 함께 잡혀온 우리 백성 수십여인과 약속하고 선물을 흩어 팔아서  그 돈으로 배를 구입 고국으로 가고자 배를 타고 도망치는데 지키던 왜군들이 이를 발각하고 뒤 딸아 양면으로 협공하며 오는 지라 미리 차고 있던 칼을 뽑아내어서 자신의 배를 가르고 바다에 스스로 뛰어 들어 자결하였다.

이러한 광경을 목도한 왜놈들은 다시 공의 시신을 바다에서 끌어내어 환열(수레로 시신을 조각내는 형벌)한 뒤에 거리에 걸었다“고 하였다.


이 사실을 숙종때 상소하여 추증으로 증병조참의를 받았다.    

또 다른 자료(난중일기 정유년 7월16일-이순신 충무공)에 이르기를

“.....더욱이 선장 이엽(李曄)이 왜적에게 묶여 갔다고 하니 더더욱 원통하다.“ 이때의 상황은 왜군이 다시 재침하는 과정에서 이를 초개하던 선장 이엽장군이 부산 앞바다에 있는 절영도 등지에 숨어 있는 왜적을 일일이 찾아내어 무찌르고 도망하는 그 잔당을 도륙하려고 배를 몰고 바깥바다로 나가던 그 때 마침 1000여척의 왜선이 재침하여 오자 강한 물살에 미처 배를 돌이키지 못하고 적에게 사로잡히게 된 경위를 자세히 적은 이순신이 친히 적은 기록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정유년(1957) 7월16일 을사(양력8월28일]

저녁에 염암군 송진면에 사는 사사집종 세남이 서생포에서 알몸으로 왔다. 그 까닭을 물으니, 7월5일에 우후가 탄 배의 격군이 칠천도에 이르러 정박하고, 6일 옥포에 들어 왔다가 7일날이 밝기 전에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이르니 왜선 여덟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우리의 여러 배들이 곧장 돌격하니, 왜놈들은 몽땅 뭍으로 올라가고 빈 배만 걸려 있어, 우리 수군이 그것들을 끌어내어 불 질러 버리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하다가 마침 적선 천여 척이 대마도에서 건너와서 서로 맞아 싸우려는데, 왜선이 흩어져 달아나서 끝까지 섬멸할 수가 없었다. 세남이 탔던 배와 다른 배 여섯 척은 배를 제어할 수가 없어 표류되어 서생포 앞바다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모두 살육 당하였다. 요행히 세남만은 혼자 숲속으로 기어 들어가 간신히 목숨을 보존하여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미더운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마저 이와 같이 희망이 없게 되었고, 더욱이 선장 이엽이 왜적에게 묶여 갔다고 하니 더더욱 원통하다.

 

반정위사(反正衛社)

국가의 기강이 문란한 지경에 이르러 왕실마저 패륜의 극악한 소용도리속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몸소 이를 응징한 엄연한 역사적 사실도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곤(李坤)

1462(세조 8)∼1524(중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정(子靜). 인문(仁文)의 아들이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병조좌랑·헌납을 지냈다. (중종 1) 9월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으로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연성군(延城君)으로 봉하여졌다.
1511년 첨지중추부사로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밀양부사로 외보(外補)되고 여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귀(李貴)

1557(명종 12)∼1632(인조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세조조의 문신 석형(石亨)의 5대손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정화(廷華)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을 떨쳤으며, 1582년(선조 15)에 생원이 되었다.
이듬해 일부 문신들이 이이와 성혼을 공박, 모함하여 두 유현(儒賢)의 처지가 위태롭게 되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글을 올려 논변하여 스승을 구원하였다.
1592년에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가(御駕) 가 서행(西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하고 물러나와 의병을 모집하여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다가 다시 어가가 주재하는 평양으로 가서 청죄(請罪)하고 방어대책을 아뢰었다.
이어 이덕형(李德馨)·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이듬해에는 숙천행재소로 가서 왕에게 회복대책을 진언하자, 왕이 후하게 상사(賞賜)하고 다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하여 군사를 모집하고 명나라 군중에 군량을 수송하게 하였다.
그는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각 읍으로 순회하며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해서 서울 수복전을 크게 도왔다.
그뒤 장성현감·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김제군수를 역임하면서 난후수습에 힘썼다.
1603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형조좌랑·안산군수·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배천군수 등을 역임하고, 1616년(광해군 8)에 숙천부사로서, 해주목사로부터 무고를 받고 수감된 최기(崔沂)를 만나본 일로 탄핵을 받아 이천에 유배되었다.
1619년에 풀려나와 1622년에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金#유15)·신경진(申景禛)·최명길(崔鳴吉)·김자점(金自點) 및 두 아들 시백(時白)·시방(時昉) 등과 함께 반정의거를 준비하였다.
이듬해 3월에 광해군을 폐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 종(綾陽君倧)을 왕으로 추대, 인조반정에 성공하여 김류·이서(李曙)·심기원(沈器遠)·김자점·신경진·최명길·이흥립(李興立)·심명세(沈命世)·구굉(具宏) 등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그뒤 호위대장(扈衛大將)·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우참찬·대사헌·좌찬성 등을 역임하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그동안 남한산성의 수축, 호패법의 실시, 무사의 양성, 국방을 충실히 할 것 등을 건의하여 국력강화에 힘썼다.
1626년(인조 4) 병조·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이해에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元宗妃)의 상기를 만 2년으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여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다가 다시 탄핵을 받았다. 당쟁이 치열하고 명·청 관계의 외교가 복잡한 시기에 일신의 안위를 잊고 나라를 위하여 공헌한 바가 컸다.
저서로는 《묵재일기》 3권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이시방(李時昉)

1594(선조 27)∼1660(현종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명(季明), 호는 서봉(西峯).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귀(貴)의 아들이며, 영의정 시백(時白)의 아우이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유생으로 아버지와 함께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2등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하여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를 모아 반란군을 토벌하고, 1625년(인조 3) 서산군수가 되었다.
그뒤 공조참판이 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에 피란하기에 앞서 순검사가 되어 먼저 강화에 가서 군비를 정비하고 경계를 엄히 하였으며, 왕이 도착한 뒤에는 8도의 군량미조달의 중책을 맡았다.
이듬해 광주목사로서 남한산성방어사를 겸하였으며, 1632년 한성부의 좌·우윤이 되었고, 이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죽자 국장도감(國葬都監)과 산릉도감(山陵都監)의 제조가 되었다.
1636년 나주목사로 나갔다가 전라도관찰사로 승진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남도의 군사를 동원하여 평안도를 방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양서(兩西)의 백성을 모아 대처하도록 하고 남도민은 군량미조달에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호란이 일어날 조짐이 뚜렷해지자 입암산성(笠巖山城)을 수축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남한산성의 위급을 구원하지 않았다는 죄로 정산(定山)에 유배되었다.
1640년 사면되어 제주목사로 나아갔고, 다음해 그곳에 안치되어 있던 광해군이 죽자 손수 염습하였다.
1642년 병으로 직을 그만두었으나 겨울에 광주수어사(廣州守禦使)가 되었고, 이어 병조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본의아닌 일로 파직되었다.
1644년 다시 광주수어사가 되었으나 마침 심기원(沈器遠)의 역변(逆變)이 일어나, 그의 형 시백과 함께 관계되었다는 흉서사건으로 피해를 당하였다.
1645년 호조참판이 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647년에는 병조참판이 되고, 가선대부에 승계(陞階)되었으며, 다음해에는 공조판서에 올랐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산릉제조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1649년 사은사의 부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외교적 수완을 발휘,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도록 하였으며, 다시 수어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뒤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역임하고, 호조판서가 되어 폐정개혁(弊政改革)에 힘썼으나 김자점(金自點)의 모역사건이 일어나자 그와 가까웠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공조판서로서 판의금부사를 겸하여 재차 호남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역설하였고, 남한산성을 개수하다가 다음해에 병으로 죽었다.
저서로는 《서봉일기》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연세정려 (連世旌閭)  더 자세한 기록

국가와 민족의 수난에 앞장서 그 본보기가 되기를 주저한 적이 없으며,

팔홍문가(八紅門家)의 13 연세정려(連世旌閭)         (기록: 政熙(첨사공 27세손)  盛永(부사공 22세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조선조에서 관리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귀감이 청백리(淸白吏)라면 일반(臣民)에게 윤리적 귀감이 되는 것이 정려이다.
정려(旌閭)는 충신·효자·절부·열녀를 표창하고 그 징표로 그 집이나 마을 입구에 정문(旌門: 紅門)을 세워 널리 알리고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 연이(延李) 가문에는 많은 정문이 세워졌지만 그 중에서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팔홍문집(八紅門家)」라고 알려진 집안에 6세에 걸쳐 연세로 13개의 정문이 세워진 것은 우리 연이(延李)가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팔홍문가의 13 연세정문의 발단은 사헌부 장령(정4품)으로 있던 이언침(李彦忱)이 조선 인종 1년(1545) 소윤(小尹: 조선시대 당파의 하나)의 비위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몰려 명종 원년(1546) 을사사화(乙巳士禍: 소윤 윤원형 일파가 대윤 윤임 일파를 몰아낼 때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은 사건)에 연루시켜 순창군수로 좌천되었다가 2년 후 또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시켜 서천으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죽었는데 그 부인 광릉안씨가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시부모와 부군에 대한 지극한 정성의 절조있는 처신으로부터 시작된다.
1) 광릉안씨(廣陵安氏: 언침의 처) 절부(節婦)
2) 지남(至男: 언침의 아들) 효자(孝子)
3) 동래정씨(東萊鄭氏: 지남의 처) 절부
4) 기직(基稷: 지남의 장자) 효자
5) 기설(基卨: 지남의 차자) 효자)-<효자삼세> 인조 어필 사액이 하사됨
6) 연안이씨의 처자(지남의 딸) 효녀
7) 돈오(惇五: 기설의 장자) 충신(忠臣)
8) 광주김씨(光州金氏: 돈오의 처) 열녀(烈女) - 인조 어필

또 숙종 32년(1706)에 기설의 차자 9) 돈서(惇敍)의 충신(忠臣), 기설의 3자 돈실(惇實)의 처, 10)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절부(節婦), 11) 영조 7년(1731)에 돈오(惇五)의 4자 후성(后晟)의 효자(孝子), 12) 돈서(惇敍)의 4자 후잠(后潛)의 효자(孝子), 13) 영조 18(1742)에 후정(后定)의 차자 상기(相琦)의 효자(孝子)가 정려됨으로써 110년 동안 6세에 걸쳐 충신2, 효자효녀7, 절부3, 열녀1, 합계 13개의 정문이 세워진 것이다.
최초 정려된 이듬해인 인조 12년(1634)에 김포 사촌(沙村: 사우리)에 정려각이 세워져 여섯 정려를 봉안했다가 인조 15년에 소실되었다.
숙종 17년(1691)에 다시 김포에 8정려를 봉안하였다가 영조 10년(1734)에 서울 남문밖 자인암(紫姻巖)에 8정려각을 이설하였으나 가세 빈궁하여 영조 39년에 다시 김포 사우리로 옮겼는데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 영조 40년에 다시 서울로 모실 것을 명하여 정조 6년(1782)에 다시 자인암에 8정려를 봉안하고 11년에 정려각을 중수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여 조선조 말까지 유지되었다.
일제에 들어 정려각 자리가 철도부지(서울역)로 지정되면서 종로 운니동으로 이전 봉안하다가(연도미상) 파주 적성(積城) 마지리(馬智里)에 충현공(忠顯公 諱 惇五)의 사당과 8정려각을 함께 신축하여 봉안하였는데 한국전란으로 소실되었다.
1968년에 남양주 진건면 신월리(新月里)에 충현공 묘역에 8정려각을 재건하였으나 붕괴되어 1984년 8월 18일 김포시 감정동에 13정려각으로 확장 복원하였다.
팔홍문(八紅門)의 집안에는 8홍문으로 끝나지 않고 대를 이어서 3세에 걸쳐 5정문이 추가로 세워진 것이다.

제1문 절부 광릉안씨(언침의 부인)
광릉안씨(廣陵安氏)는 장령공 이언침의 부인으로 홍문관 박사(博士) 광릉인 안한영(安漢英)의 둘째 딸이다.
안씨는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극진하였는데 언니 안씨도 절부로 정려된 바 있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뛰어나고 효우(孝友)하는 행실이 자연히 들어나 언니가「방씨여교(方氏女敎)」를 읽는 것을 보고 배우기를 자청하여 소학과 열녀전 등 책을 다 배우고 행동을 한결같이 본받았다.
을사사화 때 장령공(남편)이 억울하게 귀양가서 적소에서 돌아가시니 안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슬픔에 복바쳐 숨이 끊겼다. 깨어나고 피를 토하는 슬픔으로 나날을 보냈다. 이웃사람들도 사화를 두려워하여 장례에 아무도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있는 전답을 처분하여 장례를 무사히 모시었다. 이러던 중 하루는 안씨가 말했다. “여자로서 묘소를 지키기가 어려우니 제사를 정성으로 받드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하며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정갈하게 마련하여 살아있을 때와 같이 정성으로 올렸으며, 자기는 3년 동안 죽을 쑤어 연명만 겨우 했다. 시어머니께서 크게 걱정하고 밥과 나물을 권하여도 목이 메어 먹지도 못하였다.
그는 남편을 여읜 죄인이라 슬퍼하고 겨울에도 화로 불조차 쬐는 일이 없었다. 이렇게 하기를 30여년 시종일관 남편만을 사모하며 지냈다.
그는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80노령으로 별세하시니 안씨는 서로 의지하며 살다가 시어머니마저 잃으니 남들이 말하기를 ‘3년상이 지나면 아마 자진할 것이 아닌가?’하며 걱정들을 하였다. 70이 넘어서도 기일만 되면 “내가 나이 늙어 다음 제사를 지낼 수 있겠는가?”하며 친히 음식을 마련하여 제사를 올리니 그의 절행이 이웃에 본받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안씨는 1633년(인조 11)절부로 정려되었다.

제2문 효자 이지남
부친인 장령공이 유배지에서 돌아가시자 침식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부친의 별세를 슬퍼하였다. 더구나 이 때는 한참 당파싸움이 심하던 때이라 화를 두려워한 친척이나 친구들까지도 문상조차 없는 외로운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논밭을 팔아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고, 친히 아버님의 광중을 파고 돌을 골라내고 고운 흙으로 묘소를 마련하니 묘소의 면모가 반듯하였다.
그 곳에 여막을 마련하고 살아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곁을 떠나지도 않고 3년간의 묘살이를 하였다. 3년이 지난 후에도 밤낮으로 참배하고 길을 떠날 때는 하직인사, 돌아와서는 문안인사, 그리고 집에 조그만 일이 있어도 묘소를 찾아 일일이 여쭙는 것이 살아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랜 병환으로 어머니께서 위태로워지자 어머님 대변 맛까지 보았다. 변이 달면 병이 위중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변이 많이 달았다. 약을 구해 드려도 차도가 없었다. 침식을 잊은 채 목욕재계하고 울부짖으며 나를 대신하기를 청하였더니 그날 밤 꿈에 선인(禪人)이 나타나 말하기를, “지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대신할 것을 허락하였다.”하며 사라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어머니는 씻은 듯이 완쾌되었으나 지남은 허약해져서 피를 토하더니 효를 다하지 못한 채 일생을 마쳤다.
1663년(인조 11) 효자로 정려되었다.

제3문 절부 동래정씨(지남의 부인)
효자 이지남의 아내 정씨는 1530년(중종 25년) 승지 정원(鄭源)의 딸로 태어났다. 14세 어린 나이로 이씨 집안으로 시집와서 연소한 나이에도 법도에 따라 어른들을 극진히 공경하니 시어머님 말씀이 “신부의 효성은 비할 곳 없는 효부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큼 처신을 잘하였다.
이 때 친정아버지 승지공과 시아버지이신 장령공이 함께 화를 입어 돌아가시니 시모님께 청하여 함께 모시고 살기를 30년이나 되었다.
남편을 잃은 정씨는 슬픔에 겨워 하루에도 죽었다 깨어나기를 몇 번, 피눈물로 세월을 보내니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정씨 부인은 죄인으로 자처하고 입에 맞는 음식과 몸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나 물건은 아예 가까이 하지를 않았다.
시어머니 초상 때는 아들 이기설(李基卨)에게 이르기를 “너의 아버님과 너의 형이 불행하게도 일찍 별세하였으니 장례를 모시는 큰일은 그 책임이 나와 너에게 있다. 그러니 장례절차는 예법대로 행할 것이며, 그렇게 못하면 어떻게 너의 아버님을 지하에서 뵙겠는가?”하며 장식 패물을 모두 팔아서 장례비용을 마련하였다.
정씨부인은 거듭 슬픈 일만 당하니 많이 쇠약해져서 갈수록 병이 심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하루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안이 화가 이에 이르렀는데 내가 죽는다면 어머님의 제사를 부탁할 곳이 없다.” 몸을 가누어 일어나 온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모시곤 하였다.
1633년(인조 11) 절부(節婦)로 정려(旌閭)되었다.

제4문 효자 이기직
공은 참봉 이지남(李至男)의 장자이다. 어려서부터 범상하지 않아 배운 대로 실천하는 드문 효자였다. 아침저녁으로 부모에게 문안드리는 것은 물론이요, 차고 더운 것을 조절하여 편하게 해드렸으며, 부모님이 잡수시고 난 후라야 밥을 먹었다.
나이 20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니 밤낮으로 시신 옆을 떠나지 않고 7일간이나 입에 음식을 넣지 않았다.
산소를 정하는 일에도 간신히 기운을 차려서 지사(地師)와 함께 멀고 가까움을 가리지 않고 깊은 산골까지 안 간 곳이 없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바람과 서리를 피하지 않으며 온 몸이 얼어서 움직이지 못함으로 지사도 감동되어 모든 정성을 다하여 명당을 찾았다. 모든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루고 난 후에도 제사는 물론,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묘소를 찾아 슬피 우는 것은 물론이요, 곡기라곤 조로 쑨 미음을 마시며 애통해 하니 날로 수척해 질 수 밖에 없었다. 결국은 상청에서 울기만 하다가 기절하여 죽으니 더욱 비참하였다.
1633년(인조 11) 효자에 정려되었다.

제5문 효자·청백리 이기설과 꿩(孝感雉)
휘는 기설(基卨),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蓮峯)이며, 1558년(명조 13년) 지남(至男)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정축년(丁丑: 선조10년, 1577) 가을에 부친께서 갑자기 돌아가시니 기설의 나이 20세라 밤낮으로 부친의 시체 곁을 떠나지 않고 식음을 전폐한 채 슬픔에 젖어 있었다. 장례를 모신 후에도 스스로 죽기를 각오하고 엄동에도 옷 하나만 입고 빈소를 지키며 피눈물로 슬퍼하였다.
장례 후에는 여막을 짓고 아내와는 서로 보지도 않으며 3년을 그렇게 지냈다. 이런 모습을 보는 어머니 정씨도 병환이 생겨서 매우 중하여지자 단지(斷指)로 피를 뽑아 약에 타서 마시게 하니 병환은 나았다.
형 기직이 모친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육즙을 만들어 드리니 모친이 의심하여 먼저 맛보게 하였더니 기설은 육즙인지도 모르고 맛본 뒤에 모친에게 권하여 드시게 하고 물러 나와 그것을 알고 통곡하며 칼로 혀를 자르니 피가 흘러 입안에 가득하였다.
공은 무주현감에서 다시 송화연감(황해도 최서단)이 되어 기제사를 당하여 사람에게 꿩을 잡게 하였더니 잡지 못하므로 내 성의가 미진한 것이라고 문을 닫고 자책하였다. 그런데 새벽에 꿩이 대청으로 날아들어 이를 제수로 쓰게 되니 모두가 감탄하고 송화사람들은 지금까지 전하기를 그 꿩을 ‘효감치(孝感雉)’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또 갑오년(선조 27, 1594)에 모친상을 당하니 슬퍼하기를 부친상 때와 같이하고 기설이 덕천군(德川郡)으로 발인하러 가는 도중에 화적(火賊)이 나와서 범하므로 기설이 영구를 지키고 슬피 우니 화적들도 그 효성에 감동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1601년(선조 34) 염근리(廉謹吏)로 피선되고 1633년(인조 11) 효자(孝子)로 정려(旌閭)되면서 인조의 친필로 ‘孝子三世’라 사액(賜額)을 하였다.

제6문 효녀 연안이씨 처자
처자(處子) 이씨는 참봉 이지남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조용하여 함부로 보고 듣지 않으며 똑똑하고 인물이 빼어나 조그마한 티도 없고 이해력이 빠르며 말과 행동이 단정하며 엄전하였고 글을 가르치지 않아도 깨우쳐 알며 가세가 충효로 전하여 몸에 배어 천품이 아름답고, 견문에 익숙하고, 천성이 고왔다. 부친상을 당함에 슬픔을 다하여 눈물이 피로 이르며 울부짖고 몸부림치며, 까무러치기를 여러 번 하였다.
3년간을 죽만 마시고 몸이 상하게 되니 얼마 지나서 처자도 죽게 되었다. 죽을 때 “내가 지금 죽어서 아버님 곁을 따르니 죽어도 유감됨이 없으나 다만 어머님이 살아계시니 그 불효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앞서감이 죄송할 뿐이다.” 말을 마치고 운명하니 그의 나이 18세라. 동리 사람들이 효녀라고 극구 칭찬하였다. 1633년(인조 11) 효녀로 정려(旌閭)되었다.

제7문 충신 이돈오(충현공)

충현공(忠顯公) 돈오(惇五)의 자는 자전(子典), 호는 일죽(一竹)이며 1585년(선조 18)에 나고 1637년(인조 15)에 순절하였다.
나라에서 선현의 자손이라 등용함에 이를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후에 광해군 6년(1622)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시직(侍直)에 제수되었는데, 재직 중에 폐모론을 할 수 없다하며 사퇴하고 말았다. 공은 언제나 의(義)에 어긋나면 관직을 미련없이 버렸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비록 벼슬자리에는 있지 않다 하여도 사사로운 생각만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종사가 있는 강화로 찾아갔다. 이런 충정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훈련도감 낭청(訓練圖鑑 郎廳)에 제수하고 무기 공급의 일을 보고 있었다.
1637년 정월 갑자기 청군(淸軍)이 강화에 상륙하니 공은 아들을 불러 말하기를, “나는 나라에서 준 직책이 있어 나라와 함께 존망을 같이 할 것이니, 너는 너의 모친과 할머니 그리고 가족들과 생사를 같이 하여야 한다.”고 하며 성중(城中)으로 달려가니 성은 이미 적군에게 포위되어 북쪽을 향해 통곡하다가 적군과 부딪쳐 꾸짖고 굽히지 않으니 급기야 살해되고 말았다.
때를 같이하여 부인 김씨는 마니산(痲尼山)에서 적이 옴을 알고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자결하였으며 아우 돈서(惇敍)는 적에게 포로가 되자 진강(鎭江)에서 물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그들의 의와 충절에 경탄하였다.
1685년(숙종 11) 이돈오에게 특별정려가 내려졌다.

제8문 열녀 광주김씨(돈오의 부인)
증 정경부인(贈貞敬夫人) 광주김씨(光州金氏)는 1585년 군수 김태국의 딸로 태어나 자라서 이씨가문(李氏家門)의 이돈오와 결혼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남에 김씨는 가족들과 남편을 따라 강화도에 피신하였다.
처음에는 강령리(江嶺里) 초가 한 칸에 붙어 살다가 남편 이돈오가 훈국랑청(訓局郎廳)이 되니 왕래가 어려워 동문 밖 군기청(軍器廳) 근처로 옮기고 시동생 돈서에게 노부인을 모시게 하고 김씨는 새로 잡은 처소로 돌아왔다. 며칠 후 적이 강화도에 쳐들어오자 위급해 짐에 남편은 김씨에게 시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사생(死生)을 같이 하라하니 김씨부인은 남편과 영결하고 찾아가는데 밤길이 어두워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운 지경이고 길은 험하며 적군의 불길이 사방에서 일어나 성중(城中)이 몹시 소란함으로 모진 고난 끝에 마니산 아래 척분이 되는 홍명달(洪命達)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피할 길은 막막하였다. 사람들이 ‘검도(黔島)로 피신함이 좋을 것이다’하기에 그곳으로 가려고 했으나 이미 해가 저물어 가기가 어려웠다.
이 때 함께 간 홍계남(홍명달의 자)에게 말하기를,
“어두운 밤이라 동서를 분간하기 어려우며 만약 섬에 도달하지 못한 채 날이 새면 죽으려 해도 어려울 것이다. 해변으로 돌아가서 배가 있으면 건너고 없으면 바다에 몸을 던져 정결하게 죽는 것이 옳겠다.”
말하고 부득이 해변으로 가는 도중 시어머님 일행을 뜻밖에 만나고 차남도 같이 있어 천행이라 여기고 이내 산중으로 들어가 무사히 피하려 하였더니 두 아들이 양식을 구하러 혼가로 내려가고 김씨부인은 시어머님을 모시고 산중에 스며드니 적군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김씨부인은 영결을 하고 말하기를,
“부성(府城)이 이미 함락되어 남편은 반드시 나라를 위해 돌아갔을 것이니 제가 어찌 차마 홀로 살아남겠습니까?”
하고 품에서 칼을 꺼내 스스로 목을 찔러 순절(殉節)하니 모두가 놀랐다.
그 때가 1637년 53세였다. 1639년(인조 17)에 정려되었다.

제9문 충신 이돈서(忠愍公)
선조 32년(1599) 생, 인조 15년(1637) 졸 수 39,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에게서 수학하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형 돈오와 함께 가족을 데리고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강화성이 함락됨에 마니산 아래에 모신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찾아가다가 청군에게 포로가 되자 ‘충효가의 자제로서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리오.’하면서 자결하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진강(鎭江)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숙종 12년에 강화유수 홍의호가 이돈서를 강화도 충렬사에 배향할 것을 계청하여 숙종 19년(1693)에 충렬사에 배향되니 강화 충렬사에는 우리 연이(延李) 로서 죽창공(竹窓公) 이시직(李時稷), 충현공(忠顯公) 이돈오(李惇五) 그리고 공까지 세분이 배향되었다.

제10문 절부 전주이씨(돈실의 처)
감찰공(監察公 惇實)의 처 전주이씨는 병자호란 때 시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자 청군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인조 15년(1637) 자문(自刎)을 시도하여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죽지 못하고 깨어나 병석에 있으면서도 시어머니 봉양에 정성을 다하다가 결국 절사하였다. 순종 32년(1706) 이돈오에게 시호 충현(忠顯)이 가증될 때 전주이씨도 절부로 정려되었다.

제 11문 효자 이후성
광해 8년(1616) 생, 호를 소곡(蘇谷)이라하며 생원과와 진사과 두 번 급제하고 참봉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인조 15년(1637)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자 자결한 어머니(돈오의 처 광주김씨)의 시신을 수습하여 마니산 아래 가매장 하였다가 부친의 시신을 통진 고양포 임화산에 옮길 대 어머니 시신도 부장(副葬)하였다
또 이듬해 숙부(惇敍)의 시신을 진강에서 수습하여 적성 수정봉에 장사지내고 그 후 13년간 시묘생활을 하면서 부(惇五) 모(光州金氏), 숙보(惇敍), 그리고 선대에서 충·효·열 은전을 내리도록 동분서주하며 평생을 보냈다.
이 사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져 칭송이 자자하니, 마침내 공도 영조 7년(1731) 효자에 정려되고, 첨지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제12문 효자 이후잠
인조 15년(1637) 충민공(돈서)의 유복자로 태어나 관설당(觀雪堂) 허후(許厚)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은 효자가문에 태어난 것을 자부심으로 가지고 공자의 효행에 대한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였다. 즉 어머니를 섬길 때, 집에 계시면 공경을 다하고, 봉양해서 즐겁게 해드리고, 병이 들면 근심을 다하고, 병이 들면 근심을 다하고, 돌아가시면 슬픔을 다하고, 제사를 지내면 엄숙함을 다하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철저히 실행하니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또 조정에까지 알려져 숙종 6년(1680) 장원서별검(종8품)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기지 않았다.
영조 7년(1731)에 효자로 정려되고, 첨지중추부사(정3품)에 증직되었다

제13문 효자 이상기
현종 9년(1668) 생, 영조 18년(1742) 졸, 수 75, 아버지(后定)가 병조참지로 있으면서 바른 말로 직간하였으나 반대파의 미움만 사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나 상심하다가 돌아가자 공은 죽음으로 연명하면서 직간하고 아버지의 충직함을 꾸준히 상소하여 마침내 숙종 16년(1690)에 아버지가 신원(伸寃: 원통함이 풀림)되어 이조참판, 이조판서가 증직되고, 숙종 21년(1695) 청백리에 녹선 되도록 하였다.
영조 18년(1742) 공의 이러한 효행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곧 효자에 정려되었다

양민의 고혈을 농락하여 호화로운 저택과 풍요로운 전장을 마련한 적 없이 염치와 첨렴을 제일의 도덕으로 지키며 살아 온 문중으로 훌륭하신 조상을 모신 자손으로서의 긍지를 살리며  이로서 뭇 사람의 존경과 선망을 받고 그래서 오늘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받아온 우리 연안이씨다. (高閣不建)

 

투신독립 (殺身獨立) 

역사이래 연안이씨에는 역적이 없었으며 반역자가 없었다. 그 흔한 친일파명단에도 연안이씨로된 조상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의병활동,독립군)

반면에 역대로 충신과 열사 열부 효자가 부지기수이며 조국광복을 위하여 몸을 바친 독립투사가 대를 이어 수 없이 나타나 조국광복에 앞장서서 일했다  

이 동 녕 - 李 東 寧   1869∼1940년

1.대한민족독립운동을 가장 앞서서 선도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체결을 반대, 기독교애국청년단체인 `상동청년회`에 가입, 계몽운동을 시작으로 이듬해 을사조약 폐기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겪은 후 북 간도로 건너가 이상설· 여준(呂準) 등과 용정에서 최초의 현대적 정규 학교인 `서전의숙`을 설립하여 교포 교육에 적극 힘썼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김구 등과 항일비밀결사단체 ⌜신민회⌟를 조직하고, 청년학우회 총무가 되고, 1910년에는 최초의 만주`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과 교포의 교육에 첫발걸음을 내딛고, 1911년 블라디보스톡에 항일운동단체 `권업회(權業會)` 조직하며, 해외동포를 위해「해조신문(海朝新聞)`발행과, 1913년에는 단군사상을 고취하고자 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정기 앙양과 이나라 자주독립을 위하여 주야로 힘쓰니 일찍부터 대한독립투쟁의 방향을 잡는 최선두의 지도자였다.


2. 독립운동의 핵심적이고 주도적 위치에서 지도 


1919년 4월13일, 더욱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우리정부가 필수적임을 알고 이 나라 건국정신의 바탕이 된 대한민족자주독립정신(3.1정신)에 입각한`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 초대의정원 의장에 추대되고, 내무총장을 겸하였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유능한 인재들을 초치하는데 힘써 이때 이승만 안창호와 같은 미주지역 독립투사들도 영입하여 대통령직등 요직까지 안배하여 독립운동인사의 규합에 총력을 기울려 민족지도자들의 대동단결을 도모하였다. 임정의 어려운 살림을 도맡아야 하는 내무총장직은 독립자금모금과 망명해온 국무위원과 독립지사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온갖 궂은 업무로서 결코 자기 이름이나 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묵묵히 일하시며 언제나 젊은 투사들의 사기진작과 이들을 앞세워 요직을 맡기는 아량을 베푸니 국내외의 인망을 한 몸에 받아 왔다.


3.대한독립의 전통성과 대동성을 지켜온 정신적 지주 


1921년 파벌간 이념분쟁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1922년에는 안창호· 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지도자간 대동단결을 촉진했다. 임시정부에 자금이 고갈되고 내부알력이 깊어지면서 분열되기에 이르렀지만 끝까지 임시정부를 사수하고자 홀로 안간힘을 다 기울였다.

1924년경 아무도 어려운 임정살림을 맡으려 하지 않자 다시 국무총리를 맡으면서 군무총장을 겸하며, 이어 대통령 대리도 하였으며, 26년 국무령이 되기도 하였다. 이때의 임시정부내분이 극도로 심화되고 각기 자기주장만 하면서 분열을 일삼았지만 일심전력 잘 무마하여  임시정부 일대의 위기시대를 간신히 극복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의 든든한 모태가 되게 했다.

백범 김구가 국내에서 전전하며 다니다 늦게 임시정부를 찾았을 때에는 임정요인 중에 김구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배척하는 이도 있었지만 이동녕은 김구를 포용하여 적극 신임하고 내무총장직을 주어 임정 살림을 마꼈다. 이를 인연으로 하여 김구는 이동녕을 오로지 부모이상으로 받들고 모셨다.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여 초대 당수가 되었다.


4. 대한독립을 위한 대한광복군 창군의 대부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陳線)` 결성을 주도하여 일본에 직접 선전포고를 했다. 임시정부를 이끌고 장사(長沙)로 이전했다가 1940년 쓰촨성 (四川省)에서 주야로 조국광복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인고의 71세로 분사하니 임시정부 국장으로 장례를 치루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됐다. 유해는 김구가 아들 신(信)에게 유언으로 남겨 친일정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여곡절 끝에 효창공원에 모시게 하였다.  


5. 오로지 조국을 위하여 일생과 가정과 가문마저 희생


부모님 묘소는 원산 공동묘지에, 독자인 의식(義植)은 광복후 민족반역자처단에 앞장섰다가 친일정치조직에 의해 활동이 무산되고, 1950년 한국전이후 아직 그 종적을 알 길이 없다. 

이때 군사모집을 위하여 일가친척을 동원하였는데 연안이씨 문중이 앞장서 호응 하여 많은 젊은이들이 만주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 조국을 위해 몸 바친 이가 많다.   

그의 하늘을 덮는 빛난 공훈을 우리민족 골수 깊이 아로 삭여 천추만세에 길이 전하고 싶다.

"대한의 청년동지 여러분! 지금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추운땅 만주(동삼성)에서 무관학교를 세우고 소정의 교육을 받는 것은 조국을 다시 찾겠다는 군인정신의 총화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견디는 고된 훈련을 통해 강인한 체력과 인내심을 길러 무관으로서의 기백과 담력을 키우자는 것입니다." 1907년에 신민회를 조직하고 이회영 등 동지와 같이 만주 삼원보땅에 와서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우선 군인을 길러야 조국을 다시 찾을 수 있다고 외치면서 신흥강습소(뒷날 신흥무관학교)를 설치, 그 초대 교장이 된 석오 이동녕(1869~1940)이 새벽 조회 때 수백명의 사관생도를 앞에 놓고 엄숙히 훈계한 말 가운데 한토막의 절절한 나라사랑의 당부였다.

신민회는 서울에서 1907년 초에 이동녕, 안창호, 노백린 등 30여명이 조직한 항일결사였다. 이들은 나라가 장차 일제에 탈취당할 것으로 내다 보았다. 이에따라 민족독립운동도 장기전으로 갈 것 같아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설치하고 지구전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해야 경쟁력과 승산이 있다고 믿은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이동녕 외에 명문거족 경주이씨 6형제인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등이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 서간도 삼원보에 세운 사관학교의 효시로서 1911년부터 1919년까지 3천5백명의 20대 초반의 한국청년을 집중 육성한 애국의 군사학교였다. 뒤에 동교장이 된 임정요인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는 곧 우리 민족이 군인정신을 길러낸 최초의 사관집단 육성소로서 그 정신이 곧 애국애족의 효시요 요람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해서 8·15 이후 이 이름을 딴 대학을 세운 것이다"라고 '신흥'의 전통을 이을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애국의 군인정신이 곧 8·15를 쟁취할 수 있었다고 초대 부통령이 된 노 애국지사 성재 이시영은 간절히 호소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동녕·이시영으로 이어지는 사관학교의 역대 교장출신들은 무장독립전쟁론을 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로서 40년을 죽마고우로 뒷날 대한광복군 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함께 수립, 정성스럽게 민족을 이끌어 갔다.

석오 이동녕은 그 아들 의직(義直)을 이 신흥무관학교의 생도로 입교시켜 고된 훈련을 받게 했다. 이 사관학교에서 소정의 문무교육을 받은 청년무관들은 곧 실전에 배치되었다. 유명한 봉오동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대첩(1920년 10월)에 기간요원이 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신흥' 출신의 패기왕성한 우국의 청년장교들이었다.

애석한 일은 신흥무관학교를 나온 이동녕주석의 아들 의직이 만주의 특유한 풍토병에 걸려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사실이다. '신흥' 출신의 원의상에 따르면 이동녕주석의 아들(의직)이 풍토병으로 사경을 헤매이기에 빨리 중국계 병원에 후송,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동교의 교관이 몇 번 간청하였다. 그러나 이주석은 오히려 침착하게 만류하면서 "어째서 교장인 나의 자식을 먼저 치료받게 할 수 있겠느냐. 남의 귀한 자제가 병마에 시달리고 있으니 그들을 먼저 후송, 치료토록 조치하라"고 급명을 내렸다. 시간을 다투는 풍토병으로 손을 늦게 쓴 이동녕의 자제(의직)는 결국 꽃다운 나이에 왜적과 싸워보지도 못한 채 목숨을 거둔 것이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40대의 이동녕은 "네 운명이 이제 다 된 모양이구나. 부디 황천에서나마 왜적을 무찔러 빼앗긴 조국을 찾는데 앞장서달라"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이렇게 공과 사를 구분했고 공을 먼저 하고 사사로움을 뒤로 한 관후대자한 군자의 기품을 고이 간직하였다. 1919년 4월13일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때 그는 초대 임시의정원의장(국회의장)으로 "지금부터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입니다. 군주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의 나라입니다." 이때의 감격적인 대한민국 수립 선포식에서도 50대인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그는 1940년 3월13일 낡은 중국 기강의 임정청사 2층에서 72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금년 4월13일은 그가 임정을 세운지 80년이 되는 뜻깊은 연륜을 바라보게 된다. 민주의 아버지, 한국군의 통수체계를 세운 분, 한국군의 창시자, 그 분이 곧 석오 이동녕주석이다. (성신여대교수 이현희)

   

 

본관

이장녕 (李章寧)  한말의 독립운동가.

연안

백우
별칭 일명 장영
활동분야 독립운동
출생지 충남 천안
주요수상

건국훈장 독립장(1963)본관 연안(). 호 백우(). 일명 장영(). 충청남도 천안() 출생. T 한국무관학교 제3기 졸업생으로 1900년 대한제국 육군참위()가 되었다. 1908년 만주로 망명, 후에 이회영(이시영(이동녕() 등이 망명해 오자 함께 신흥강습소()와 신흥학교를 세우고 교관으로 독립군 사관()양성에 진력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 조직에 참여, 참모장에 취임하고, 1920년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다. 이어 대한독립군단참모총장, 신민부()의 고문 등을 역임하던 중 1932년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에 의하여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대기 (李大基)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1888. 6.14~1940. 6.19   애족장(95)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21년경 비밀결사 의용단(義勇團)에 입단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용단은 김찬규(金燦奎) 등이 만주 길림(吉林)의 군정서(軍政署)와 연결하여 군자금을 지원을 목적으로 결성한 독립군 지원단체로서 주로 경상도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그는 1922년 10월 이응수(李應洙)·이종국(李鍾國) 등과 함께 대구 공설운동장에 모여 부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기로 결의하고 경북 안동을 비롯한 영천(永川)·군위(軍威)·영일(迎日)과 경남 창녕(昌寧)등지의 경상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이들은 독립운동자금요구서 및 시국에 대한 경고문, 길림 군정서 발행의 사형선고서와 같은 문서 등을 각처의 부호들에게 우편으로 우송하였으나 친일부호들의 외면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일이 일격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22년 11월 대구 계림여관(鷄林旅館)에서 투숙객으로 위장 은신하고 있던 중 피체되었다.
이 일로 그는 192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예심종결결정서(1923. 9. 30.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923. 12. 22. 대구지방법원)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208∼211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제6권 93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0집 747∼750면
·매일신보(1922. 12. 21, 12. 30)
·동아일보(1922. 12. 20, 12. 22, 12. 23, 12. 30)

 

이 역사적 절제와 피치못할 운명적인 사실이 점철된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연안이씨는 천여년 긴세월동안에 이어온  기록을 만 천하에 영광스럽게 알려서 연안이씨가 단순히 고관현작에 양반가문이라는 편집된 이름에 싸잡혀 살아온 집안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 후손들도 역시 삼한세족(신라-고려-조선)의 선두에 서 온 영광스런 그 조상의 위상과 기개를 이어 이나라 발전에  당당히 앞장서 나가는 기틀이 되기를 바라는 바 크다.  이 관 희

 (앞으로 이 글은 수많은 기록을 보태기 위하여 많은 종현님들 참여로 수정됨)                      

각 문중에 숨은 이야기를 다시 복원하여 한자리에 모으고 싶으니 많은 자료를 아끼지 마시고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http://www.IL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