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혜고경) (투수남하) (병란수공) (수장충혼) (반정위사) (연세정려) (살신독립)

 (藁鞋藁經) (投綏南行) (兵亂殊功) (水葬忠魂) (反正衛社) (連世旌閭) (殺身獨立)

 

연안이씨(延安李氏)

삼한갑족(三韓甲族) 연안이씨(延安李氏)

삼한갑족(三韓甲族) 중 최고로 손꼽는 벌족(閥族)을 흔히 연리광김(延李光金) 혹은 광김연리(光金延李)라 하는데, 연안이씨(延安李氏)에서 태자첨사공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공적을 세우고 충절과 청백리가 많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발군하며 문장과 공적으로 통례문부사공파와 판서부감공파의 월사(月沙-이정귀)의 가계(家系)는 이른바 그 삼한중 가장 명문(名門)의 전형(典型)이다.

높은 벼슬이 많이 나서 세력을 떨치고 부귀를 누렸다고 해서 다 명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흔히 명문을 말할 때 그 집안의 벼슬이나 세도(勢道)보다는 문장, 학문, 도덕을 먼저 손꼽는다. 그래서 역사상 숱하게 세도가(勢道家)라는 게 있었으나 모두 당세(當世)에 그치고 말았는데 퇴계(退溪), 율곡(栗谷), 월사(月沙), 사계(沙溪), 우암(尤庵)의 학문이나 도덕 문장은 오늘까지도 생명을 지닌 체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고전(古典)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을 보면서 이른바 명문의 조건은 달리 고려해야 함을 알게 된다.

연안이씨의 시조(始祖)는 본래 당(唐)나라의 장군이었던 이무(李茂)이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서기 660년에 소정방군(蘇定方軍)이 신라(新羅)의 동맹군으로 백제(百濟)를 침공하였을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참여하였던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신라에 귀화(歸化)하여 연안백(延安伯)에 봉해짐으로써 본관(本貫) 연안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또 그러한 연유(緣由)로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의 효령사(孝靈祠)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 소정방(蘇定方), 이무(李茂) 등 세 장군을 배향(配享)하였다.

연안이씨는 다같이 연안백 이무(李茂)를 시조로 하고 있으면서도 계통(系統)을 달리하는 3 집안으로 나뉘고 있다. 이습홍(李襲洪, 太子詹事), 이현려(李賢呂, 判少府監事), 이지(李漬, 通禮門府使)를 각각 중시조(中始祖)로 하는 3파가 그것이다. 이 3파는 중시조끼리의 계통을 달리하므로 본관과 시조는 같으나 계촌이 불가하다.

이 연안이씨는 조선조(朝鮮朝) 상신(相臣) 8명, 대제학(大提學) 7명, 청백리(淸白吏) 6명, 문과(文科) 250명을 배출했다. 상신의 숫자도 상위에 속하지만 대제학은 전주이씨(全州李氏), 광산김씨(光山金氏)와 더불어 7명으로써 전체 씨족(氏族) 중 수위(首位)를 차지하며, 문과 급제자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안동권씨(安東權氏), 파평윤씨(坡平尹氏), 남양홍씨(南陽洪氏, 土洪  및 唐洪), 안동김씨(安東金氏, 舊安東 上洛金氏 및 新安東 壯洞金氏), 청주한씨(淸州韓氏), 광산김씨, 밀양박씨(密陽朴氏) 바로 다음 순위라고 하지만 연안이씨는 전주이씨와 혼인을 거부한 사실로 수난을 겪은 바 있어 대대로 왕실과의 척신이 없으며, 세도를 한 바가 없으므로  종실지친, 척혼외신,세도권신등 권세와 정실로 현달한 가문들을 제외하면 댠연 연안이씨를 능가하는 가문은 없다. 연안이씨의 고관현작을 받은 연유는 이조의 왕실위주의 공록 보다는 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고 선비의 기개를 뒷받침한 순수성에 있어서 그 의의가 드높은 것이다.

특히 연안이씨는 조선초부터 이조말엽과 일제강점기하에서도 문사와 선비로서의 기개와 대소 전란에 임하여 나라와 민족에 대한 충절이 드높고 심력을 다한 활략이 두드러지며 왕정의 부당함이 있으면 앞장서 이를 시정하였으니 연산조와 광해조의 악정을 타도하고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을 주도한 사실 역시 그 중 한 예다.

  조선말기에는 온 가문이 몸소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에 전력하여 몇몇 가문은 전몰하기까지 한 상태이며 아직까지 기록상 민족반역의 대열에서는 단 한사람의 이름조차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일사불란한 태도를 지켜 왔고 민족독립을 위한 구국일념은 독제정권과의 항거역시 탁월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 襲洪派) 이 파(派)에서는 대체로 강직청빈한 학자많고 특히 청백리는 타 모든 성씨중에 압도작으로 많다.대개 당쟁(黨爭)의 권외(圈外)에서 초연(超然)하게 지낸 문신(文臣)들이 많으며 사색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초연하게 불편부당한 태도는 뭇 당파들을 압도하는 역할을 했다. 또 덕행(德行)이 뛰어나서 ‘8정문(八旌門)등 13정려각 역시 다른 성씨에서는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발군(拔群)이며 조선초기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 까지 강직한 기개는 이어 젔으며 임진왜란 병자호란외에 대소 내외란에 있어 태자첨사공 후손들은 눈부신 활략을 하였는데  특히 일제강점을 당하고 나서 민족 독립운동에 가장 일찍이 앞장서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학교를 세우며 많은 독립군 지도자를 배출하여 나라를 칮는데 앞장섰다.

조선 초기의 대표 인물로는 계은(桂隱) 이귀령(李貴齡, 康胡公)이 있다. 그는 태자첨사공의 6대손 이원발의 장자로 이원발(李元發)은 이성계의 부친과 선대부터 노관지교로 일찍부터 이성계(李成桂, 太祖)와 친교가 있었지만 개국에 반대하여 절개를 지켰으므로 고려충절공신으로 후세에 알려저 있으나 그 아들 귀령과 귀산에 이르러 벼슬을 하기에 이르렀다. 뒤에 길주군안무사(吉州郡按撫使), 동북면병마절도사(東北面兵馬節度使)를 거쳐 태종(太宗) 때 병조판서를 지내고 검교좌의정(檢校左議政)에 이르렀다. 벼슬에서 물러나온 후 전야(田野)에서 20여 년을 지내어 94세의 수(壽)를 누렸다.

그의 아우 이귀산(李貴山)은 경상(慶尙),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다. 귀산(貴山)의 아들 이속(李續)은 성격이 강직하여 태종이 그의 아들을 부마(駙馬)로 삼으려고 복자(卜者, 盲人)를 보내어 아들의 사주(四柱)를 묻자 크게 노하여 거절하였는데, 그로 말미암아 화(禍)를 입기도 했다. 이 사건은 소위 고혜고경(藁鞋藁經)이라하여 "짚신은 가죽이 아닌 짚으로 삼는다"라는 은어로 "이성계의 왕실(가죽=革)과의 혼인은 거절하겠다는 반 귀족주의 표현이기도하여 곧은 성미를 일컬어 말할 때 표현이다. 그의 손자 인문(人文)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인휴(仁畦)는 세조 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올랐고, 인문(人文)의 아들 이곤(李坤)은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 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오르고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분봉(盆峰) 이주(李澍)는 태자첨사공의 13대손으로 직간(直諫)으로 유명하였으며, 선조 16년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이율곡(李栗谷)을 공격하는 데 선봉에 나섰고, 그 일로 하여 가선군수(嘉山郡守)로 좌천되었다. 분봉(盆峰)의 아들로 해고(海皐) 이광정(李光庭)은 선조 23년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1592) 때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고 승지(承旨)의 직에 오래 있으면서 또 종사관(從事官)으로서 명장(明將)이 싸우지 않고 왜군과 강화(講和) 교섭을 하는 것을 알게 되자 명장(明將)과 명사(明使)들에게 탁월한 외교적인 활동으로 이를 막아 호조판서에 특진되었다. 뒤에 공조판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다시 이조판서, 대사헌(大司憲)을 지내다가 주청사(奏請使)로 명(明) 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어 호종공신(扈從功臣) 2등에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인조 때 형조판서를 지내고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에 왕을 강화(江華)로 호종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높은 관직에 있는 동안 당론(黨論)에는 참여치 않았고 한 번도 지탄(指彈)을 받은 일이 없는 명신(名臣)이었다. 그의 아우 화음(華陰) 이창정(李昌庭)은 광해군(光海君)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자 단신(單身)으로 서궁(西宮)에 들어가 대비에게 문안을 올려 세인을 놀라게 하였다. 이괄란(李适亂, 1624)에 인조(仁祖)를 공주(公州)로 모셔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오르고 뒤에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지냈다.   

이광정(李光庭)의 아들 탄옹(灘翁) 이현(李현, 忠定公)은 효행으로 이름났으며, 이괄란(李适亂)에 호종원종공신이 되고 병자호란(丙子胡亂,1636)에는 양서관향사(兩西管餉使)로 군량 보급을 맡았다. 왕이 청군(淸軍)에게 항복함을 보자 통분(痛忿)함을 금치 못한 끝에 단식(斷食)했다. 뒤에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지고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인목대비의 ‘목릉지(穆陵誌)’를 엮었으며 또 서예에도 뛰어났다.

이현(李현)의 증손이 이우당(二憂堂) 이만원(李萬元)이다. 그는 평안도관찰사를 지내고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는데, 숙종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비(廢妃)에 극간(極諫)함으로써 왕의 대노(大怒)를 사기도 했으며 청백(淸白)하기로도 이름났었다.

이창정(李昌庭)의 손자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 靖僖公)은 특히 해서(楷書)에 뛰어났는데, 현종(顯宗) 원년(1660) 복상(服喪) 문제로 송시열(宋時烈)에게 몰린 허목(許穆)을 구하려다가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로 좌천되었다. 뒤에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박천(博川) 이옥(李沃)은 문장과 서예로 이름나고 경기도관찰사, 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지냈다.

이밖에도 임진왜란에 공을 세우고 광해군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전야(田野)로 돌아가 학문에만 전념하여 경사(經史), 천문, 지리, 율학(律學), 병술(兵術)에 정통했던 연봉(蓮峰) 이기설(李基卨, 朴枝華의 문인), 영조 때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도승지(都承旨), 형조(刑曹)와 공조판서를 지낸 성헌(醒軒) 이지억(李之億) 등이 빼어났다.

근세(近世) 인물로는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1689-1940)이 있다. 그는 을사조약(1905)이 체결되자 폐기 운동을 전개하고 북간도로 건너가 용정(龍井)에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했으나 재정난으로 귀국하여 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했다. 다시 만주(滿洲)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과 교포(僑胞) 교육에 힘썼으며 또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이상설(李相卨)과 함께 해조신문(海潮新聞)을 발간하여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1919년 상해(上海) 임시정부의 의정원원장(議政院院長), 대통령대리(大統領代理), 국무령(國務領), 범무총장(法務總長) 등을 역임하고 중일전쟁(中日戰爭) 때 임정(臨政)을 이끌고 장사(長沙)로 이전했다가 그곳에서 죽었는데 임시정부의 국장(國葬)으로 치장(治葬)했다.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 복장(複章)이 추서(追敍)되었다. 공파(太子詹事公派)가 청백리 2명을 배출하였다.

● 판사공현려파(判事公賢呂派) 이 파는 판사공의 8대손인 저헌(樗軒) 이석형(李石亨, 延城府院君, 文康公)에 의해 중흥이 이루어졌다. 그는 세종(世宗)에서 성종(成宗)에 이르는 6대를 섬긴 명신(名臣)으로 많은 치적(治績)을 쌓았으며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당시 유학계(儒學界)의 훈구파(勳舊派)로서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고려사(高麗史)’와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했다. ‘월사집(月沙集)'에 보면 그의 아버지 회림(懷林)이 늦도록 아들이 없어 삼각산(三角山) 신령께 빌어 잉태(孕胎)를 하였는데, 흰 용(龍)이 커다란 바위를 깨고 나온 꿈을 꾼 이튿날 낳았으므로 이름을 석형(石亨)이라 지었다 한다. 유명한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는 그의 현손(玄孫)이며, 묵재(墨齋) 이귀(李貴)는 5대손(월사와는 9촌간)인데, 이 두 사람이야말로 연안이씨를 명문의 자리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 명종 19-1635, 인조 13,  文忠公)는 우리 역사상 손꼽는 한문학(漢文學)의 대가(大家)로 상촌 신흠(象村 申欽), 계곡 장유(谿谷 張維), 택당 이식(澤堂 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中期)의 4대문장가(四大文章家)로 일컬어진다.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문인(門人)인 그는 선조(宣祖) 때 대제학을 지내고 인조(仁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는데 학자와 문장가로서의 명성(名聲)을 명(明) 나라에까지 떨치어 국내외 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 월사의 자손에서만 3대대제학(三代大提學), 부자대제학(父子大提學)이 나왔다. 그처럼 빼어난 학자의 가문인 ‘월사집(月沙집)’의 정치적 번영을 뒷받침한 인물이 곧 묵재 이귀(墨齋 李貴)와 그의 아들 조암(釣巖) 이시백(李時白)이었다.

이귀(李貴, 1557, 명종 ·12-1633, 인조 11, 忠定公)는 이율곡(李栗谷), 성우계(成牛溪)의 문인으로 선조(宣祖) 36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외직(外職)을 거쳐 평산부사(平山府使)에 이렀다가 광해군(光海君)의 난정(亂政)을 개탄하고 사직했다. 1623년 김류(金瑬)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주동하여 광해군을 폐하고 인조(仁祖, 綾陽君)를 세웠으며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이 되고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一等)에 올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무렵 반정 주체 세력이 ‘공서(功西)가 되고 반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측이 ’청서(淸西)로 갈리자 그는 공서(功西)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뒤에 병조(兵曹), 이조판서(曹判書)를 지내고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 때에는 화의(和議)를 주장했다가 탄핵을 받기도 했다.

그의 아들 시백(時白, 忠翼公)과 시방(時昉, 忠靖公)도 아버지를 따라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여 둘 다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올랐으며, 시백(時白)은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져 효종(孝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아우 시방(時昉)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서 군사 동원을 늦추었다는 죄를 입고 유배되었다가 인조(仁祖) 18년 제주목사(濟州牧使)가 되어 당시 제주에 안치(安置)되어 있던 광해군이 죽자 손수 염습했으며, 효종(孝宗) 때 형조(刑曹), 호조(戶曹),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병자호란 때 강화성(江華城)에서 자결한 이시직(李時稷, 掌令)은 시백(時白)과 6촌간이었다. 시백(時白)의 5대손인 구옹(癯翁) 이후(李후[王+厚], 忠獻公)는 영조(英祖) 때 좌의정으로 세자사부(世子師傅)를 겸임하고 있었는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평양원유(平壤遠遊) 사건으로 물의가 일자 책임을 느껴 자결(自決)하였다.

한편 월사(月沙)의 두 아들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仁祖朝 吏判, 大提學)과 현주(玄洲) 이소한(李昭漢, 仁祖朝 刑參)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이들 3부자(三父子)는 송(宋) 나라의 삼소(三蘇, 蘇詢, 蘇軾, 蘇輟)와 비교되었는데, 특히 백주(白洲)의 자손들이 크게 번창하였다.

백주(白洲)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맏이인 청호 이일상(靑湖 李一相)이 효종 때 대제학을 거쳐 현종(玄宗) 때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냄으로써 '월사(月沙)-백주(白洲)-청호(靑湖)'의 3대대제학(三代大提學)이 이루어졌다. 역사상 3대대제학을 낸 집안은 광산김씨의 사계집(沙溪 金長生집), 달성서씨(達成徐氏)의 약봉집(藥峰 徐渻집) 등 3 집안뿐이었다. 백주(白洲)의 둘째아들 가상(嘉相)은 효자로 이름을 남겨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셋째아들 만상(萬相, 進士)은 요절(夭折)했고, 넷째아들이 유명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장인인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이다. 정관재(靜觀齋)는 인조(仁祖) 때 문과에 급제, 효종 때 호당(湖堂)을 거쳐 뒤에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가 사퇴하고 양주(楊洲)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며 문하(門下)에서 아들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를 비롯하여 농암 김창협, 삼연 김창흡(金昌翕), 창계(滄溪) 임영(林泳) 등 쟁쟁한 학자들을 길러냈다.

한편 현주(玄洲)의 맏아들 동리(東里) 이은상(李殷相, 玄宗朝 刑判, 禮判)과 넷째아들 매간(梅磵) 이익상(李翊相, 肅宗朝 吏判)이 빼어났다. 한말(韓末)에 이름 높던 심재(心齋) 이도재(李道宰)는 바로 매간(梅磵)의 8대손이다. 이도재(李道宰)는 한말의 군부(軍部), 학부(學部), 내부대신(內部大臣)을 지내면서 광무(光武) 2년(1898) 지석영(池錫永)의 청에 따라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 의학 기관인 한성의학교(漢城醫學校)의 설치를 주도하였다.

백주(白洲)의 4 아들은 이미 말했지만 손자(孫子)인 조(朝) 자 항렬에서 ‘신(臣)-보(輔)-원(源)-수(秀)-우(愚)-익(翼) 자 항렬까지 전후 약 10대에서 정말로 대단한 많은 인물이 나왔는데, 그 주요 인물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대제학 이일상(李一相)의 둘째아들이 숙종 때 시문(詩文)으로 천재의 칭(稱)을 들었던 명암(鳴巖) 이해조(李海朝, 신소설 작가와는 동명이인)요, 정조-순조 때의 청렴한 학자인 중주(中洲) 이직보(李直輔, 純祖朝 吏判)는 명암(鳴巖)의 손자다. 영조 때 시조(時調)의 대가로 대제학, 이조판서를 지낸 삼주(三洲) 이정보(李鼎輔)는 명암(鳴巖)의 형 성보(成輔)의 손자이며, 삼주(三洲)의 아우 익보(益輔)는 영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명신이다. 영조 때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평양원유(平壤遠遊) 사건에 인책(引責) 음독자결한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는 삼주(三洲)와는 생가쪽으로 4촌이요  중주(中洲)와는 6촌간이다[천보(天輔)의 아버지 주신(舟臣)이 작은집인 가상(嘉相)에게 출계함}. 또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의 계자(系子) 문원(文源)이 정조 때 오조(五曹)의 판서를 지냈고, 문원(文源)의 아들 존수(存秀)는 순조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이만상(李萬相)의 손자인 송벽당(松蘗堂) 이정신(李正臣)(경종조 兵參)은 월사(月沙) 가문에서 다소 이단적인 위치에 있었던 듯 하거니와 대개 그들 일가가 서인(西人), 노론(老論) 계열에 속했던 바와는 달리 소론계(少論系)로서 노론을 몰아부쳤고, 영조가 즉위한 뒤 신임사화(辛壬士禍, 1721)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귀양까지 갔었다. 옛날의 사색(四色)은 대체로 학연(學緣), 혈연, 지연(地緣)을 따르기 마련이라 가령 이퇴계(李退溪)의 영남학파는 거의 동인(東人)-남인(南人) 계열이었고, 이율곡(李栗谷)의 기호학파(畿湖學派)는 서인-노론계였다. 말하자면 스승이 노론이면 그의 제자 모두가 노론에 속하였다. 이정신(李正臣)의 집안이 모두 노론임에도 불고하고 유독 소론계에 속하였던 까닭은 숙종 때 소론계의 실학자(實學者)였던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의 문인이었던 때문이라 생각된다(소론의 영수(領袖)는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였는데 서계(西溪)는 현석(玄石)과 같은 반남박씨(潘南朴氏) 집안이었다).

이정신(李正臣)의 자손에서 철보(喆輔, 숙종조 吏判), 길보(吉輔, 工判), 복원(福源, 영조조 대제학, 정조조 좌의정, 喆輔의 아들), 성원(性源, 정조조 좌의정, 吉輔의 系子)이 나왔고, 쌍계(雙溪) 복원(福源)의 맏아들 시수(時秀)가 순조 때 영의정, 그의 아우  극옹(屐翁) 만수(晩秀)가 순조 때 대제학을 지냈으니 곧 부자대제학(父子大提學)이다.

이밖에도 영의정 시수(時秀)의 손자 공익(公翼)이 형조판서, 종질(從姪) 가우(嘉雨)가 철종 때 명문장(名文章)으로 이조판서를 지냈고, 순조 때 명필(名筆)로 이름난 판교(板橋) 이상원(李相源, 예판)은 이정신(李正臣)의 종손(從孫)이다.

한편 백주(白洲)의 넷째아들인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아들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숙종조 吏參)도 당대에 거유(巨儒)로서 많은 후진을 길러 내었고 많은 저서를 남겼다. 지촌(芝村)은 경종 1년 신임사화(辛壬士禍)로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이 유배될 때 함께 귀양을 갔다가 객사(客死)했다. 지촌(芝村)의 아들 양신(亮臣, 영조조 大司諫)은 기원(杞園) 어유봉(魚有鳳)의 문인으로 영조조 소론의 영수(領袖)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했다가 유배된 일이 있었다. 정조(正祖) 때 음보(蔭補)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까지 올랐던 이민보(李敏輔, 刑判, 判敦寧)는 양신(亮臣)의 아들로 작은집에 출계하였는데, 그의 아들 시원(始源)이 순조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역시 순조 때 글씨와 전각(篆刻)에 뛰어났던 옥호(玉壺) 이조원(李肇源)은 시원(始源)의 아우이다. 시원(始源)의 아들 학수(鶴秀)가 이조판서를 지냈고, 조원(肇源)의 아들 용수(龍秀)가 형조판서, 용수(龍秀)의 아들이 ‘석농체(石農體)로 유명했던 석농(石農) 이종우(李鍾愚, 철종조 吏判)이며, 석농(石農)의 아들 교익(喬翼)이 고종 때 예조판서를 지냈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로부터 그의 7대손(秀자 항렬)까지 도합 8대에 정승 6명, 대제학 6명이 나왔는가 하면 판서(判書) 급은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이다. 따라서 월사(月沙) 집안에는 조선 왕조가 문반(文班) 우위(優位)였던 만큼 특히 크게 자랑하는 ‘문(文)’자 시호(諡號)가 흔하였는데, 월사(月沙)가 문충공(文忠公), 아들 백주(白洲)가 문정공(文靖公), 손자 일상(一相)이 문숙공(文肅公), 단상(端相)이 문정공(文貞公), 은상(殷相)이 문량공(文良公), 익상(翊相)이 문희공(文僖公), 증손자 희조(喜朝)가 문간공(文簡公), 5대손 정보(鼎輔)가 문간공(文簡公), 직보(直輔)는 문경공(文敬公), 6대손 복원(福源)이 문정공(文靖公), 성원(性源)이 문숙공(文肅公), 시원(始源)이 문간공(文簡公), 조원(肇源)은 문경공(文景公), 7대손 존수(存秀)가 문익공(文翼公), 만수(晩秀)가 문헌공(文獻公), 8대손 가우(嘉愚)가 문정공(文貞公), 종우(鍾愚)가 문헌공(文憲公), 익우(若愚)가 문간공(文簡公) 등등이었다.

월사(月沙) 가문의 경우 선조-고종대까지 300여 년 간 대대로 학자, 문장가, 명신을 숱하게 배출하였으면서도 세력 신장과 불가분의 관계인 국혼(國婚)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점 또 역신(逆臣)이나 탐관(貪官) 하나 없었다는 사실 등은 그 월사(月沙) 집안의 명망(名望)을 더욱 빛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 통례문사공(通禮門使公 漬派) 이 파(派)에서도 대제학 1명을 비롯, 적지 않은 인물을 배출했다. 그 중추 인물로 세조(世祖)-성종(成宗) 때의 공신(功臣)인 정양공(靖襄公) 이숙기(李淑琦)를 꼽을 수 있다. 세조 2년 무과(武科)에 급제한 그는 평양, 영변 등지의 판관(判官)을 거쳐 이시애란(李施愛亂)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으로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으며 성종 즉위 후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전후 두 차례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공을 세웠고 뒤에 관찰사, 절도사(節度使) 등을 역임하고, 성종 말년에는 형조(刑曹), 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지냈다. 그는 무신(武臣)이었지만 후손에서 이름난 문신(文臣)이 많이 났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가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 文僖公)이다. 정양공(靖襄公)의 증손인 오봉(五峰)은 선조 17년 문과에 급제, 삼사(三司)의 여러 벼슬을 거쳐 임진왜란 중에는 이조좌랑(吏曹佐郞), 부제학(副提學) 등으로 명(明) 나라의 원병(援兵)을 가능하게 한 데 공을 세웠고, 대명(對明) 외교문서를 도맡아 기초(起草)하는 등 외교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전란이 끝난 뒤에는 대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올라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에 봉해졌다.

오봉(五峰)의 아들 경흥(景興)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고, 조카인 만사(晩沙) 이경의(李景義, 仁祖朝 吏參)는 당대의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순조(純祖) 때 형조판서를 지낸 정운(鼎運, 貞敏公)과 숙종(肅宗) 때 예조판서를 지낸 익운(益運, 靖肅公)은 형제로서 오봉(五峰)의 9대손이다.

정양공(靖襄公) 이숙기(李淑琦)의 아우 숙감(淑瑊)은 세조 때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뽑힌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 吏判 光國功臣 2등, 文淸公)은 숙감(淑瑊)의 증손이므로 오봉(五峰)과는 8촌간이다.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이조(吏曹),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낸 이숭원(李崇元, 忠簡公)은 정양공(靖襄公)의 4촌이다. 그는 죽은 뒤 중종(中宗) 때에 이르러 청백리에 추록(追錄)되었다. 숭원(崇元)의 8대손인 화촌(和村) 이술원(李述源, 忠剛公)은 영조 4년 거창읍(居昌邑)의 좌수(座首)로서 이인좌란(李麟佐亂)이 일어나자 도망간 현감(縣監) 대신 성을 지키다가 반도(叛徒)에 의해 희생되었는데 왕이 친히 어사(御使)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충신정문(忠臣旌門)을 세웠다.

 

□ 역대주요인물(歷代主要人物)

李  茂(신라, 延安伯, 始祖) 李汾禧(고려元宗朝 上將軍) 李  槢(忠烈朝, 上將軍)

李貴齡(태종조 左議政)    李貴山(태종조, 觀察使)    李淑瑊(세조조, 吏參)    李仁畦(세조조, 功臣)   

李石亨(성종조, 判中樞)   李崇元(성종조, 兵判)       李淑琦(성종조, 戶判)    李  坤(중종조, 禮判)  

李後白(선조조, 大提學)  李光庭(선조조, 吏判)  李弘老(선조조, 관찰사)  李기[山+夔](명종조,僉知中樞)

李  熹(선조조, 郡守)       李  澍(선조조, 正言)        李好閔(선조조, 대제학)  李基卨(광해조, 禮賓寺正)

李廷龜(인조조, 좌의정)   李  貴(인조조, 吏判)   李明漢(인조조, 대제학)  李時聃(인조조, 同知中樞)

李景義(인조조, 吏參)    李昭漢(인조조, 刑參)    李현[示+玄](인조조, 관찰사) 李昌庭(인조조, 관찰사)

李時稷(인조조, 奉常寺正) 李希建(인조조, 府使)      李 禬(인조조, 府使)       李  稠(인조조, 獻納)    

李  梡(인조조, 持平)        李克仁(인조조, 持平)      李時白(효종조, 영의정)  李一相(효종조, 대제학) 

李時昉(효종조, 刑判)       李壽仁(효종조, 정언)      李時程(효종조, 都事)     李端相(현종조, 副提學)

李殷相(현종조, 刑判)       李有相(현종조, 獻納)      李觀徵(현종조, 判中樞)  李海朝(숙종조, 대제학)  

李翊相(숙종조, 吏判)       李喜朝(숙종조, 大司憲)   李  沃(숙종조, 禮參)      李鳳徵(숙종조, 刑參)   

李萬元(숙종조, 관찰사)    李  慣(숙종조, 府使)       李正臣(경종조, 관찰사)  李天輔(영조조, 영의정)

李후[王+厚](영조조, 좌의정) 李益輔(영조조, 吏判)  李鼎輔(영조조, 대제학)  李雨臣(영조조, 都摠管)  

李之億(영조조, 判尹)       李命植(영조조, 이판)      李亮臣(영조조, 禮議)      李萬敷(영조조, 학자)   

李  拭(영조조, 학자)        李宜朝(영조조, 학자)      李祉承(영조조, 정언)      李福源(정조조, 좌의정)

李性源(정조조, 좌의정)     李時秀(정조조, 영의정)  李敏輔(정조조, 判敦寧)   李文源(정조조, 吏判)    

李祉永(정조조, 참판)        李晩秀(정조조, 대제학)  李存秀(순조조, 좌의정)   李肇源(순조조, 判義禁) 

李直輔(순조조, 吏判)       李祖源(순조조, 兵判)       李鼎運(순조조, 兵判)      李益運(순조조, 大護軍)

李始源(순조조, 提學)        李  偰(순조조, 義士)       李敎翼(순조조, 畵家)      李龍秀(순조조, 判書)    

李明迪(순조조, 吏判)        李趾秀(헌종조, 府使)      李公翼(헌종조, 兵判)      李若愚(철종조, 吏判)   

李嘉愚(철종조, 吏判)        李鍾愚(철종조, 兵判)       李喬翼(철종조, 禮判)     李佾愚(철종조, 府使)

李祖淵(고종조, 吏議)    李道榮(한말, 書畵家)   李道宰(內部大臣)   李鉉燮(志士)    李炳華( 한말.儒學者)  

참고한 자료의 출처 : http://home.megapass.net/~kksga99/munhwa/weolsa.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