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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空에 높이 솟은 凡常한 그 姿態 태자첨사공/별좌공파 *연안이씨 근본 *시조공 이무 첨사공파의 기개 * 솔무듬과 사고막골 * 무 릉 정* 예천을 지킨다 앞으로 다음 예로부터 연안이씨를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러 왔습니다. 이는 연안이씨라는 성[姓]씨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씨족에 비교할 때 늘 우월[優越]한 소질을 타고 났으며 탁월한 능력으로 이나라 이민족을 위하여 오랫동안 크게 공헌[貢獻]하였다는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러한 기대를 하더라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는 존경[尊敬]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씨가 무엇이요?"하고 물어 오면, "연안이씨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이것은 듣기에 조금 거북하므로 될수록 피하여야 하고, "저는 연안 이가 입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그런대로 대답을 제대로 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성을 겸손하게 부르는 방법입니다. 아무리 삼한갑족이노라 하고 뽐내기 앞서 먼저 다른 씨족을 존경해 주는 것이 좋으며 존경을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삼한갑족이라 하더라도 존경받지 못할 일을 하면 싸잡혀 전 씨족이 함께 매도될 수 있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훌륭하신 우리 조상님들은 이 땅에 수많은 씨족으로부터 존경받는 성씨로 부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삼한갑족이라는 화려한 명성으로 추앙을 받게 된 것이니 우리에 이르러 이를 소흘히 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우쭐거리는 것도 경솔한 일이고 너무 주눅이 들어서 할말을 못하는 것도 욕스러운 것이 랍니다. 인사 한마디라도 훌륭하신 조상의 자손답게 행동을 하자는 것이 저의 의견입니다.그러므로 앞으로는 자신의 성을 말할 때 반드시, "연안 이 가입니다."또는, "저희 연안 이 가는..."하는 표현이 보다 겸손한 자태이며 칭찬 받는 행동인 것입니다.허나 같은 우리 연안이씨들끼리 있을 때는 연안 이가"라는 표현보다는 `연안이씨`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앞으로 네 성이 무엇이냐"하고 물으면 "이가 입니다."하고 대답하고, "관향은 어디냐?"하고 물으면, "연안입니다."하면 참으로 멋진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관향[貫鄕]이라는 것은 그 성씨의 근원지를 말합니다. [태자첨사공파별좌공파] 연안이씨 근원은 황해도 연안[黃海道 延安]입니다.중국에 있는 연안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현명하신 태자첨사공파 별좌공후손이신 혈족 여러분! 왜 갑자기 "태자첨사공파"란 말이 나오고 또 "별좌공후손"은 무슨 뜻입니까?하고 무척 헷갈리는 표정을 짓고 계시는데 여기서는 이점을 분명히 말씀 올리려고 하는 것입니다.좀 어렵더라도 잘 들어 두시고 어려운 말이라고 지나치지 마시고 잠시외어 두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첨사"또는 "별좌"라 하는 것은 모두 벼슬의 이름인데 `태자첨사`는 고려시대의 벼슬로 정식 명칭은 태자첨사[太子詹事]이며 왕의 아들 가운데 장차 임금으로 정한 자를 태자라 부르고 이 태자를 도와서 교육을 시키는 일을 맡은 벼슬로 정승의 반열에 가깝다고 볼 수 있으며,"별좌[別坐]"는 이성계가 나라를 왕씨들로부터 빼앗아 나라를 만든 이씨조선의 벼슬로서 계급은 정오품[正五品]에 해당하는 것이니 지금으로 말하면 문관으로서 중견 공무원 정도의 벼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족보는 조상과 후손들을 계통에 따라 구분 지워 설명해야 그 줄기와 뿌리가 혼동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임을 미리 이해하여야 합니다. 오로지 시조[始祖]는 딱 한 분만 계시는 것이고, 다음으로 그 시조의 후손이 차츰 여러 형제로 나뉘여서 갈라져 자손이 연연히 이어지게 되면 그 줄기를 따라 계통을 설명하여야 하는데,이때 파[派]라는 말을 부치게 되고 조상님의 휘자[諱字=이미 돌아가신 어른의 이름을 부를 때 "휫짜"라발음함]를 함부로 부르기가 어려우니 이때에는 조상께서 지내신 최후의 벼슬 이름을 부쳐 부르게 되고 어른을 받들어 부를 때는 반드시 공[公]이란 표현을 달아야 하기에 앞에서 "태자첨사공파"라 또는 이를 줄여서 "첨사공파"라 하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별좌공파는 태자첨사공 후손 중에 또 여러 갈래로 자손이 많이 분가[分家]해 그 계통[系統]을 분명히 해야 하겠기로 그 아래파 즉 작은 파라는 의미로 흔히 소파[小派] 또는 지파[支派]라 하지만 구태여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이 불편[不便]하니까 이를 생략[省略]해서 "별좌공파"또는 "태자첨사공파 별좌공파"라는 표현을 쓰게 되는 것이 랍니다. 다시 간추려 말씀 올리면 태자첨사공파는 연안이씨 10대문파중에 하나인 대파[大派]의 으뜸 되는 파이며,별좌공파는 태자첨사공파중 한 소파라는 것임을 계통적으로 그림을 그려서 이해하시면 쉽습니다. 앞으로 같은 태자첨사공파 모임에서는 "저는 별좌공파입니다"라고 하면 되지만,전체 연안이씨 모임이거나 다른 씨족이 물어 오면, "저는 태자첨사공파에 별좌공파입니다."하면 좋은 대답이지요. 혹시 별좌공파에 대해서 잘 모르면, "예천 송곡[솔무대미]를 아시는지요."또는, "사고막골에 우리종택이 있습니다."라고 정중히 대답해서 별좌공파가 송곡에 살고 있슴을 널리 알리십시요.자손의 수가 늘고 자손이 크게 성공[成功]하면 천갈레 만 갈래로 종파가 무성해 지게 되고 자손[子孫]한사람 한사람이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 소속 종파가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며, 사람마다 내집안과 자신의 가문의 영달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면 매사를 조금도 소흘히 해서는 안될 것이 외다. 그중의 하나가 조상을 존경하는 향념[向念]이 필요한데 여기에 대한 관심을 쏟는 일을 흔히 강조하기 마련인데 그중에 조상의 묘소를 관리하는 일이라던지 족보를 간행하는 일은 종사[宗事]라고 하여 매우 중요한 인간의 도리로 여기고 있는데 이러한 일이 오늘까지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져 온 문중은 조상의 산소와 족보가 잘 다듬어져 왔고 자손들에게도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었는데 이글을 쓰고 있는 저부터 이러한 일에는 개으른 탓에 제대로 일을 갖추지 못하여 면목이 서지 않는 형편이고 이러한 말을 할 자격조차도 부족하지만 장차 저와 같은 개으른 자손이 더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조상에 대한 일은 하면 할 수록 생광[生光]스러운 일이라 여기시고 이 일에 앞장서시는 많은 어른들에게 박수를 보내주시고 존경의 마음을 갖어 주시는 것도 좋한 일이거니와 될수 있는한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도와 드리는것은 더욱 훌륭한 일입니다.별좌공파에도 이러한 훌륭하신 자손이 많이 계셔서 조상님들이 못다펴신 종사를 잘 보듬어 나가시면 더욱 생광스럽겠고자손들뿐 아니라 집안간에도 칭찬받으실 훌륭한 공노자[功勞者]가 되시는 것입니다.. 태자첨사공파와 우리 별좌공파에서도 숫한 난리로 말미암아 실전되어온 조상님의 묘소찾기와
우선 제사라도 모실 설단을 하는 일등등이 그 과제중의 하나라 할 수 있겠습니다.그러기
위해서는 현제 모시고 있는 가까운 조상님들의 묘소관리에도 개을리함이 없이 책임을 다하여
훗날 후회됨이 없도록 하여야 할것입니다. 이씨[李氏]의 시조는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로 부터 시작되고 일찍이 공자가 노자[老子]라 존경하던 어른도 우리의 조상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답니다. 이러한 말을 하게 된 동기는 당[唐]나라 황제의 성씨도 이[李] 씨인데 황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그 뿌리를 거슬러 상고해 보니 그게 확실하게 고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삼황오제가운데 덕명황[德明皇]이신 고요[皐陶]씨가 이씨의 근본이 된다고 했는데 고요씨는[고도라 읽지 않음] 고기직설[皐夔稷楔]이라는 중국의 4대 명가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처음 설[楔]의 후손인 은[殷],그리고 직[稷]의 후손인 주[周]에서 이[理]라는 벼슬을 세습적으로 맡아 왔기로 성을 이[理]로 하였지만 앞서 노자로 불려지는 현원황제[玄元皇帝], 이 이[李耳]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李]라는 성을 갖게 되었는데 이분이 곧 노자[老子]십니다. 현원황제라는 명칭은 당나라때 이르러 노자를 그렇게 부르게 하였던 것이며 우리 연안이씨는 현원황제 노자에 대해 보다 각별한 관심을 기울려 보시기 바랍니다. "노자"라는 명호는 공자가 노자를 자신보다 "훨씬 훌륭하신 선생님"이라 부르다 보니 그 제자들이 한문으로 노자[老子]로 불렀던 것이며 본명은 아니고 "노자"그 자체가 모든 이들이 존칭으로 부를 수 있는 명호가 되었던 것이 랍니다. 우리 이[李]씨성의 창시자 현원황제께서는 주[周]나라 장서각[藏書閣]을 관리하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도덕경[道德經]이라는 유명한 책을 저술하셔서 오늘의 각박한 삶들을 위해 옳은 가르침을 주시고 도교[道敎]의 교조[敎祖]시며 현재 중국인들의 대부분이 우리가 유교나 불교를 믿는 것 이상으로 이 어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합니다. 이 씨 성은 중국에서는 단 한가지 본[本]뿐이며 동남아나 세계각국에 퍼져 나가 살고 있는 이[李]씨이나 이와 비슷한 음의 "Lee"따위도 그 조상이 동양에 근거한다면 같은 이[李]씨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합니다. 제가 우연한 기회에 "세계이씨대보[世界李氏大譜]라는 몇권의 두꺼운 책들을 보았는데 이는 중국에서 간행한 것으로 전 세계이씨들의 계통을 체계있게 엮어 놓아 흥미 있게 본바 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궁금하면 우리나라 국회도서관에도 한질 구해 두라고 하였으니 기회 있으면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우리 나라에서는 이씨성을 갖은 씨족이 매우 많습니다. 우스개로, "남산에서 돌을 던지면 이가 아님 김가머리가 깨진다"라고 할 만큼 김씨 다음 두번째로 많은 성이고 그 갈래도 수없이 많지만 우리와 같은 맥을 잇고 있는 성씨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우리나라에서 경주[慶州]를 본관으로 쓰는 경주이씨나 전주[全州]를 관향으로하는 전주이씨가 있지만 두가지 성이 모두 세계이씨족보에는 관계없는 조선고유[朝鮮固有]의 성씨이며 다만 음만 이[李]라는 글자로 닮게 했을 뿐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조선의 이씨성은 모두 546개의 본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대개는 신라 육촌 중에 하나인 급량부양산촌의 촌장을 시조로 하는 경주이씨의 분파라고 할 수 있으며 전주이씨 역시 경주이씨와 한줄기 성씨로 보아도 무방하고 그 외 고성이씨나 농서이씨가 중국에서 왔다 하나 막연하고 인천이씨가 있으나 이는 김해김씨에서 분파된 성씨라는 점에서 우리와 혼동하지 맙시다. 다만 연안이씨만은 전혀 이들 성씨와 뿌리조차 전혀 다르다는 것만 잘 기억하십시다. 우리 성씨의 시조가 되시는 어른의 이름자 즉 휫짜는 李 茂라 쓰고"무 자 할아버지" 라 읽습니다.이 어른과 이름이 닮은 조선초기 무장이 하나 있지만 그는 시대적으로도 크게 차이가 나는 동명이인이니 혼동하지 않기 바랍니다. 시조공 께서는 [차마 이름을 자주 거론할 수 없어 시조공-始祖公-이라 함]원래 중국 당나라 고종때 황실과 같은 성을 쓰고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하려고 군사를 이르킬때 소정방[蘇定方]의 참모장 격인 중랑장[中郞將]자격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공헌을 하시게 되자 김유신과 김춘추가 공을 무척 추앙, 지금 황해도 땅을 식읍으로 하고 연안백[延安伯]이라는 높은 자리까지 마련하니 공은 당나라로 돌아가시지 아니하고 이 땅에 자손을 남기시게 되어 오늘의 우리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조 할아버지에 대해 좀더 자세한 말씀을 올리고자 합니다. 먼저 시조 할아버지의 태어나신 날자는 아직 기록이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아 모르고 있습니다.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왜놈들의 침공에 사면초가가 되었던차 이를 극복할 심산으로 당나라에 지원군을 요청, 이에 중랑장이란 직함을 지니시고 서기 660년3월에 당나라 왕실의 대표하여 오신 것인데 이미 역사적으로도 밝혀진 일이지만 김유신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오천결사대에 의하여 진격하지 못하고 부여 입성하는 약속날을 지키지 못하자 당나라 장군들이 신라의 힘이 약하다는 것을 지레 짐작하고 트집을 잡아 백제를 멸하는 즉시 신라까지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우리 시조 할아버지께서는, "신라를 치는 일은 당나라의 당초 의도와는 다르며 신라장병 또한 용기 백배한 모습을 보니 함부로 신라 군사를 넘보는 것은 명예스럽지 못하거니와 지금 고구려가 백제 망하는걸 그냥 보고 있을 형세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정세하에 오히려 백제를 평정하는 일 조차 실패할 우려도 있으니 우선 신라 군사들과 무예 시합을 하여본 다음에 신라까지 병합[倂合]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라고 욕심 많고 무모한 당나라 장군들을 달래였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일촉즉발 당나라와 신라가 다시 엉겨 붙어 또 전쟁을 한마당 치루어야하는 비극적인 위기를 견제하여 많은 생령을 구해 주었을 뿐 아니라 이로서 당나라의 체면도 지키고 온 국력을 들어 백제를 치느라고 피로에 지친 신라의 위태한 정황도 모면케 하여 주어 마침내 양국간의 평화[平和]를 유지케 한 당시로서는 매우 탁월한 조치를 하셨기 때문에 그 공적[功跡]은 역사에 높이 기록되어 마땅한 것입니다. 이 기록은 조선환여지[朝鮮奐與誌] 망해정기[望海亭記]에 있는바 "신라를 구해 준 은인[恩人]"이라고 김유신이 극구칭송[極口稱頌]하였다는 기록은 당시로서는 매우 감개 깊었던 모양으로 기록 역시 실상을 그대로 묘사한 듯 매우 상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역사는 정복을 해서 영토를 넓힌 장군에 대해서는 그 공을 높히려 하지만 막후에서 아슬아슬한 위기를 극복하고 많은 인명의 회생을 미리 막아준 공로에 대하여는 그 기록을 소흘히 다루는 형편이라 시조 할아버지의 억천만겁[億千萬劫] 기리기리 칭송하여 마땅한 공적을 우리 자손들은 잘 알고 본받아야 합니다. 옛말에도 곡돌사신. 초두란액[曲突徙薪 焦頭爛額]이라는 지혜로운 말이 있는데 이는 미리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굴뚝을 고치고 불붙기 쉬운 땔감을 치워 버린 방비를 해서 사고를 막은 공로는 인정하지 않고,오히려 예방[豫防]은 커녕 사고[事故]가 터진 다음에 불을 끄느라고 머리털이 타 버리고 얼굴이 그을린 자의 공로만 쳐들어 인정해 준다는 말과 흡사한 것입니다. 옛말하나 그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시조 할아버지께서 이미 이러한 문제를 미리 통찰하시고 일을 잘 마무리 지운 것을 알게 된 김유신과 김춘추는 그야말로 당나라와의 전쟁을 또 시작하여야 하는 위기를 간신히 모면케 하여준 시조 할아버지의 탁월하신 판단을 고맙게들 여기고 이에 답하기 위하여 황해도 연안을 중심으로한 식읍[食邑] 700호를 드린것이 아닙니까. 그후 김춘추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은 서기 668년 고구려까지 아울러 마침내 삼국 통일의 대업이 성취되자 김유신의 주청도 있어 이 고마운 은인에게 보다 확실한 보답을 하고자 식읍 1000호와 연안후[延安候]로 하여 우리 시조 할아버지를 공경하면서 당나라로 가시는 것을 만류하였던 것입니다. 황해도 일대의 토지와 인구를 소유하고 관장하였다는 것으로 일시적인 행정관이 아니라 영구적인 왕토[王土]와 같은 것이며 봉건시대 제후[諸侯]의 하나로 볼 수 있는 높으신 위치입니다. 지금도 경상북도 군위군[軍威] 효령면 장군동에는 제동서원이 있는데 그곳 숭무전[崇武殿]에는 3장군[이 무,김 유신,소정방]세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祠堂]이 있고 해마다 단오절[음력 5월 5일]에는 제사를 올리였는데 이제는 3월 3일로 날짜를 바꾸어 지금도 그 고을의 수장인 군수[郡守]가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墓所]는 황해도 연안지방에 있다는 전언이 있으나 남북이 가로막혀서 찾을 수 없고 다만 1821년 6월경에 연안읍 서쪽 옥녀봉 아래 은일동에 큰 고총이 하나 있다는 것을 그 기록문과 묘의 지석[祉石]을 현재 제2국립묘지 가장 높은 자리인 충남 유성읍 갑동 신좌유향[申座酉向]에 단소[壇所]를 정하여 해마다 자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참배객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묘지석에는 분명히 "延 安 伯 李 茂"라고 기록되어 전합니다. 국립묘지 경내에 이미 1500년이 지난 어른의 단소[壇所]를 정할 수 있게된 사연도 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 박씨인데 국군묘지법을 만들고 이미 그 부근에 모시고 있던 시조 할아버지의 단소를 옮길려고 하자 우리 종친들이 그 대통령을 찾아가서 시조 할아버지의 역사적 공적을 말한즉 그 대통령도 "마땅히 이 어른은 이 자리 맨 높은 곳에 설단[設壇]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현재 대전시 중구 구암동에 있는 연원사[延源祠]에서 매월 10월 3일에 참배를 올리고 있으며 이때에는 연안이씨 각파 문중이 구름같이 모여 가히 장관을 이룬답니다.우리 별좌공파에서도 해마다 이곳에 대표를 보내서 참제[參祭]하고 있습니다. 제가 1960년도부터 1970년도까지 충남 대전에 직장 생활을 하는 중에 왕태골할아버지 휘 병자.조자[炳朝]공이 먼길에 오셔서 참제하신후 어린 저를 찾아 주시면서 고향소식과 아울러 여러가지 격려말슴도 전해주시곤 했고,저희 가친 백봉[의면義冕=憲=白峰]공께서도 참제하시면서 이번에도 또 도유사[都有司]도하고 초헌관을 맡게 되었다고 흐뭇해 하시는 모습을 보곤 했었습니다. 요즘은 연안이씨 대종회가 발족하여 모든 제사와 행사를 여기에서 주관한다 하여 대종회 종회장이 되는 분이 초헌관을 맡아 집전한다고 합니다. 생각컨데 일부 성씨가운데 종례 전통적 관습으로 해 오던 제사집전절차를 개선한다는 이유로 종인들끼리의 친목목적으로 모인 사회단체가 만든 제사절차에 따라 집전한다면 혹시 금전 또는 일시적 권력을 갖인 사람이 장자인양 행세하였다는 씻지 못할 오류를 범해 집전했던 사람들 조차 뒷날 까지 비난 받을 소지가 남아있어 제사만은 그래도 명실 공히 장자집전의례원칙을 지켜나갔으면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연안(延安)이라는 본관을 갖게된 동기에 대해서 아직 분명한 해석이 없지만 저의 생각을 피력한다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서인 사기(史記)한서(漢書)에는 연년안화(延年安和)라는 구절도 있습니다만 신라의 무열왕부자와 김유신이 시조공의 공덕이 그야말로 나라가 만대를 통해 연년평안(延年平安)을 기리는 의미로 연안후(延安候=候爵=爵錄의 둘째자리)로 이름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고 식읍을 지금의 황해도 연안일대 였기에 때문에 훗날 이 지역을 연안(延安)이라는 지명을 붙이게 되었고 연안이씨의 본관으로 지칭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상고하건데 연안이라는 지명은 훗날 고려때에 연안후 이무공의 추봉명을 근거하여 이름하였다고 보아야합니다 시조 할아버지 이후 많은 세월과 시대가 바뀌는 바람에 기록이 흩어지긴 했으나 후손들
가운데 우선 10개파로 나뉘어서 각기 파를 형성하는데 그 중에 가장 주축을 이루는파가,
태자첨사공파, 판소부감공파, 통례문사공파와
예부상서공파,이부시랑공파,전법판서공파,대장군공파,밀직부사공파,판도정랑공파,영광군수공파등
모두 열개의 대종파가 나누어져 있습니다.그리고 족보도 각기 항렬을 달리하게 되어 따로
따로 만들고 있습니다. 태자첨사공파는 다른 파와 같이 시조로부터의 세계가 중간에 기록이 없어져 잘 알 수 없고 족보에 대한 기록이 시작된 것은 이조 중기 부터인바 강호공[康胡公]호적을 근거로하여 처음으로 시작하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것입니다. 태자첨사공파의 중세조[中世祖]는 습자 홍자[襲洪=즉 어른의 휫자부를때는 글자를 따로따로 부름]로 부터 시작되어 확실한 기록이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어 족보[族譜]라 이름하며 오늘까지 태어난 사람의 이름과 생몰년월일과 부인의 성씨와 벼슬을 하였다면 벼슬이름등을 적어 왔는데 지금까지 기록은 1984년 갑자년[甲子年]에 만든 태자첨사공파 족보가 가장 최근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세조[습자.홍자]께서 고려의 벼슬인 태자첨사직위에 계셨었기에 자손들은 모두 태자첨사공이라 하며 앞으로 중세조를 "태자첨사공할아버지"로 일컷기 바랍니다.태자첨사공 할아버지께서는 극자.영자[克榮] 할아버지이하 자손 중에 원자.발자[元發]할아버지가 중요하신 일을 남기신 어른이 신데 이 어른은 고려에서 전공판서[典工判書]로서 재상의 높은 직열의 벼슬에 계셨고 이성계와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이성계가 고려를 배반하는 것을 보고 절개를 지키고 이성계와 절교했다 하는데 이 기록은 원천석[元天錫]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로는 포은 정몽주가 야심찬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의 집요한 나라 빼앗기 음모에 대항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드디어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사주로 조영규의 철퇴를 맞고 시체마저 수습하지 못할 만큼 참혹한 그 정경은 오백년이 지나도 아직 그 피가 마르지 못하여 지금도 핏자국이 선명하다 할 정도인데 이 끔찍한 것을 오직 우리 조상중 한분에 의해 수습하여 수래에 싣고 연안이씨의 전장이 있었던 용인땅에 옮겨다 묻어 드렸는데 지금 그때 그 살벌하던 분위기를 생각해도 오싹하거니와 서슬이 퍼런 안하무인의 이방원이도 이 용기와 의리 있는 행동에 꼼짝 못하고 그냥 잠자코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은 당시 뜻있는 선비들 가슴을 쉬원하게한 참으로 통쾌한 의거[義擧]라 아니할 수 없었으며 그 늠늠한 기개는 이조 500년동안 조선 선비의 본보기가 되어 온 것입니다. 그후 왕이된 이방원에 의해 부마지명을 반대했다는 보복을 당하는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이 늠늠한 기상은 어느 누구도 추종하기 어려운 일이라 할 것입니다.당시 제몸이나 사리는 벼슬아치들에게 기막힌 충격을 안겨 주고도 남음이 컷었던 것입니다.연안이씨 가운데 가장 기개가 높고 의리가 강하며 역사상 모든 이가 존숭받는 청백리를 가장 많이 배출한 우리 첨사공파의 기맥이 이미 이때 자리 잡았다 하여도 지나침이 없다고 봅니다. 이제 태자첨사공 할아버지이후 손세가 크게 일어나 다시 열여덟의 지파로 나누어서 세계를 이루게 되었는데 경기 용인을 중심으로하여 경북 예천,문경,상주,봉화.흥덕,김천,전북 전주,고창,평북 강동, 경기 판교,과천,파주,양주,김포,수원,적성,평산,개성, 강원 철원, 충북 충주,진천,음성,제천, 황해 백천, 연안, 전남 영암,고흥,충남 태인,당진,평남 평양,순천,경남 함안, 양산등지에 분거하고 있습니다. 2000년 가을에 새롭게 사당을 신축하였는데 위치는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서리 구수동(*지도에는 불당골로 나옵니다)으로 강호공이 세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사패지(賜牌地)30만평을 중심으로 태자첨사공을 비롯한 조상분의 사당을 장대하게 준공하여 가히 명승지로서도 손꼽을 만 하니 연안이씨는 물론이고 누구던지 자손들의 교육을 위하여 한번 배알 하시는 것도 권장할 만합니다(42번또는 45번도로에서 용인 이동면 서리로 접어들면 가깝습니다) 지금 우리가 고향이라고 부르는 솔무덤과 사고막골!참으로 정겨운 곳이랍니다.우리가 여기를 떠나 살면서 늘 눈가에 아리삼삼하게 떠오르는 구름재!느티남거리!오릉골!황새재!당갓들!머득서리!모죽넘어!분통골!선녀케!석밭태!질구지!찬양재! 모두 우리의 마음 가장자리를 흔들어 놓는 정겨운 곳이지요. 여러분이 아시고 있는 개울까,들판,골짜기, 웅덩이,등등 무슨 이름이라도 이름이 있는 것이면 모두 적어 보십시요.그리고 저에게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다음에 동내지도를 입수하면 책 을 다시 인쇄할때 모두 올려서 우리 함께 돌려 가며 보기로 합시다. 설사,설악산이 설경이 어떻고,내장산 단풍이 어떻고,제주도 한라산이 어떻고 들 하지만 다만 일시적인 흥미에 불과하고 오로지 이 정든 송분사곡 구석구석에 사연을 담고 있는 고향 산천이야 말로 우리 연안이씨 별좌공파 혈족들에게는 어머니의 보금자리처럼 포근하고 아늑하며 객지 생활에 엉키고 설킨 설음과 긴장을 풀어주는 곳이 랍니다.우리 연안이씨 별좌공파가 여기에 자리를 잡게 된 때는 지금부터 약 400여년전이 됩니다. 원래는 경기도 용인군 판교와 구수동 일대에 모여 살았던 것인데 기록에는 별좌공할아버지의 아드님이신 교위공 위浙자.수壽자 할아버지께서 자리를 정하셨다고도 하나 먼저 용문 금곡동에 잠시 머무셨다가 안동땅 와룡이라는 곳에 앞서 자리를 정하셨다가 이곳으로 옮기셨다는 기록은 믿을만 합니다. 현재 경상북도 민속 보존 자료 제 71호로 지정되어 있는 연안이씨 별좌공파 종택은 교위공[校尉公] 할아버지의 친 손자 되시는 응應자 할아버지의 아드님이신 덕德자 창昌자 할아버지께서 임진왜란 이후에 지금 현재의 그 터에 본체는 미음자형으로 12칸 우진각 지붕으로 이익공[二翼工]에 파련대공[波連臺工]형으로 지으셨다 합니다. 당시로는 재종 형제간 되시는 관觀자 징徵자[호=芹谷] 할아버지께서 마침 경상관찰사로 계시면서 이 동네를 찾아 주시고 종택[宗宅]을 지으시는데 여러가지 힘을 보태 주셨다는 말도 전합니다.이 어른의 조부 되시고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신 북백공[北伯公] 昌자 庭자할아버지께서 임진왜란 당시에 행방불명이 되신 율리공 희熹자 할아버지에게 양자까지 하셨다가 자식된 도리로 율리공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잘못을 자탄하시고 스스로 파양하셨는데 당시만 해도 당숙질간 이였으며 임진난리후애鑯은 사연도 많지만 우애 또한 남달랐다고 합니다. 덕德자.창昌자 할아버지는 호를 사고[沙皐]라 하셨는데 현재 사고구려[沙皐舊廬]라고 현액은 경상관찰사 관자.징자[觀徵]할아버자지께서 쓰셨으니 이 어른은 역대조선 명필 64인중 한분에 드시는 유명하신 분입니다.누구든지 후손이라면 한번이라도 조상의 남기신 보물을 살펴보시고 천하명필이 쓰신 이 현액도 감상하면서 마음으로라도 조상의 얼과 정성을 되새겨 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이 사고[沙皐]라는 호를 따라 사고막골이라는 속명의 동내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하고 한편 안동 와룡면 마골에 잠시 머물다 오셨기에 사고마골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하는 한편 언덕고[皐]자를 따라 송고[松皐],또는 솔무덤이라는 별칭도 모두 이 어른의 호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면 동내이름의 유래를 풀이하는 매우 가까운 해석이 될 것입니다. 현재는 송곡동[松谷洞]이라고 행정명칭이 붙었지만 이것은 불과 몇 십년전에 부쳐진 이름이요 모두 솔무덤[松皐.松奔. 沙谷]을 합쳐서 두자 매김을 한것으로 봅니다.흔히 고[皐]자와 분[奔]자는 비슷하여 혼동하기 쉽고 보니 한때는 송분[松粉-松墳]이라고도 썼는데 이는 그시대에는 제법 엘리트라고 자처했던 면서기님들이 닥치는대로 쓰기도 해 왔지만 이제는 이를 잘 밝혀서 옳게 써야만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바르게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고[皐]라는 글자는 "작은 언덕" 즉 무덤처럼 자그마한 언덕이라는 의미의 한자인데 솔무덤이라는 속칭이 붙은 것이랍니다. 한편 "솔"이라는 음에는 솔 나무라는 의미도 있지만" 쇠"즉 금속[金屬]이라는 의미도 있답니다.말의 종류가 적은 때에는 모든 금붙이를 "쇠"라고 하였으며 금을 "슬" 이라는 음으로 불은 예가 많이 있습니다.경주의 금성[金城]은 '신라`라는 말과 가까운 음에서 비롯된것임을 이해하면 도움이 될것입니다. 아마도 옛날에 부근에 쇠아니면 금이 많이 생산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넘어 동네이름이 "설넘"즉 금능[金陵]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것을 보면 무슨 사연이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요?여하간 앞으로 여러분들이 조금더 연구해 볼만한 건더기는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고 옛날에는 낙동강을 사이에둔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대로서 현재의 휴전선처럼
장기간의 긴장감을 고조[高調]시키는 전쟁마당이였을 것입니다.지금 낙동강지류에 북으로는
내성천이 가로막혀 있고 남으로는 낙동본류가 배수진을 치고있어 천연의 요세다운 지리적
조건을 가추고 있었으며 현제 이 강들이 합치는 삼강어귀에서부터 옛날 무기들이 다수
발굴되기도 합니다.또한 부근에서 토장이나 석장의 엣날 묘지가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아직도 앞산에는 둥근 모양의 큰 무덤처럼 생긴 산이 우둑하게 서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무심하게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분명히 무슨 사연이 깊이 매겨져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잘뫼산 남녘을 바라보면서 무릉정 언덕에 기상을 펴고 솔무덤 사고막골 반천년이어 연안이씨 별좌공파 보금자리라 * 이 노래는 필자가 6.25사변때 송곡동에서 피란살이를 하면서 고향의 아름다운 정취를 그려 지은 것으로 호명국교 운동회가 열리면 동내응원가 삼아 목이 터지게 불렀답니다. 연안 이씨 별좌공파가 한자리에 모일라치면 의례히 종택아니면 사고막골과 솔무데미 뒷산 무릉정에서 모이게 마련인 것입니다. 무릉[武陵]이라는 말은 옛 중국에서 나온 말인데 무릉도원[武陵桃源]이란 말을 들어 본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이 상상하는 아름다운 세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3세기경에 있었던 진[晉]이라는 시대에 한 어부가 강을 따라 배를 저어 거슬러 올라간즉 복숭아 꽃이 만발하고 기화요초가 즐비한 어느 골자기를 찾아 간 일이 있었는데 몇백년전에 일어난 난리조차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기이하게 여겼는데 그후 동양에서는 이 무릉[武陵]을 몇 백년을 살아도 죽지 않고 오래오래 장수하며 즐겁게 살 수 있는 이 지구상에서 별천지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하는곳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그후 이 어부가 다시 찾아가려고 했지만 길을 잃어 다시는 가 볼 수 없었고 많은 시인 묵객들이 동경하는 곳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나리는 곳이 되고 말았지만 오늘날 서양에서 말하는 "파라다이스"또는 "유토피아"즉 이상향[理想鄕]의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솔무덤이 뒷산 산방이 있었던 산골을 거슬러 개울물 따라 올라가면 절 골이라는 곳이 있고 그 등성이를 서쪽으로 틀어 올라서면 샘골이라는 아늑한 집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곧 무릉정[武陵亭]이 있는 그야 말로 무릉입니다.우리 연안이씨 별좌공파의 무릉도원이요 마음의 고향[故鄕]이랍니다. 무릉정[武陵亭]은 송원공[松園公] 손자이시고 저의 5대조이신 정鼎자 기基자 할아버지께서 안동 와룡면 마골 도수곡[桃樹谷]에 있었던 정자를 이건[移建]해 오시면서 현액은 당시 명필로 손꼽히던 김성근[金聲根=海士]호조판서에게 부탁해서 글씨를 받아 걸었는데 그때 이 글씨를 받아 가지고 오신 어른이 명鳴자 구九자 할아버지로 먼길에 수고하셨다는 일화가 전해 옵니다. 우리 연안이씨 별좌공파가 여기를 중심으로 생활의 터전을 잡고 오순도순 살게 된 것도 모두 이러한 사연이 담긴 마음의 안식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하며 이로서 조상님들이 남겨 놓으신 숨결을 다시 호흡하게 되는 당당한 자손으로서의 긍지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영남에 내려 오셔서는 안동땅 와룡에 잠시 기거하신 일이 있으시다고 했지만 확실한 것은 바로 이 건지산[乾芝山]아래 가운데 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되셨는데 여기에도 아리고 슬픈 기구한 사연이 담겨 있답니다.이것은 역사에도 엄연히 기록되고 있는 사연이긴 하지만 임진란을 겪은뒤 우리 별좌공파로서는 매우 위태위태 아슬아슬한 고비를 의미하기도 한답니다. 듣는 바에 의하면 이조말엽 전란을 피하여 가던 유명한 도사[道士]가 반공중에 홀로 우뚝하게 서 있는 이 건지산을 바라보더니 하는 말이, "참으로 기이한 산이 여기에도 하나 있구나!저산이야 말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건지는 산이라 이름을 건지산[乾芝山]이라 함직합니다.이동내를 둘러싸고 마을이 셋 있는데 서쪽에 있는 마을에서는 천하에 유명한 권세가가 나오고 동쪽에 있는 마을에서는 조선갑부가 나오겠지만 가운데 있는 마을에서는 천하에 이름있는 선생님이 나오셔서 이세상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시게 될 것이나 동내 모양이 둘로 갈라져 있으니 장차 한마을로 합치게 되어야 좋은 일이 성사될것인데 지금은 무척 아쉬운 일이라"하였답니다. 안질동내에서는 장대감이라는 세도가가 나왔고 동쪽 행소리에서는 당대 조선갑부가 나왔음을 볼때 비록 믿을 만한 일은 아닐지라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것은기이한 일입니다.우리 양동내가 일치단결 해서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되면 이 마을에서 그야말로 세계적인 구세주가 태어나오실런지 모를 일이라 생각됩니다. 碧空에 높이 솟은 乾芝山이여 凡常한 그姿態는 우리의 마음 希望을 일구면서 子孫萬代를 우리들은 여기가 永遠한 故鄕 별좌공할아버지는 호를 반농제[半聾齊]라 하셨는데 서기 1458년 무인년생이시고 1480년에 22세 되시던해에 진사로 상의원별좌에 나가셨다가 그이후에는 벼슬에 나가시지 않으셨고 53세되시던 1511년에 돌아가신 걸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부인되시는 거창신[愼]씨할머니는 연산군의 비인 신씨[愼氏]와는 종자매간으로서 기구하게도 별좌공할아버지는 연산군과 종동서간이 셨는데 연산이 10년간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포악한 짓을 많이 했지만 종동서되시는 별좌공할아버지에께 몇차레나 높은 벼슬로 정중히 모시려고 간청하였으나 사양하시고 김종직의 문인으로서 이미 연산의 포악성을 짐작하시고 화를 피하여 당시 살고 계시던 용인군 판교[지금 분당부근]을 떠나 자취를 감추기 위하여 문경세재를 넘어 오신 것이였고 이러한 참담한 고뇌를 참으시려고 호조차 "이 세상 모든 것을 듣지 안는다."는 뜻으로 반농제[半聾齊]라 하셨을 것으로 보는바어언 500여년을 거슬러 이 별좌공 할아버지의 헤아릴 수없이 착잡하신 그때 그 심기를 다 못 헤아려 가히 안타까울 따름인져..患難疊疊古今同 愁心兢兢人間事-환난첩첩고급동 수심긍긍인간사=옛날이나 지금이나 환난은 끊임이 없이 이어지고 걱정거리는 언제나 그치지 않으니 인간이면 이미 타고난 운명이라...............후손의 낙서[落書]한자락이 랍니다. 별좌공 할아버지께서는 한동안 영남에 내려오셔서 자손들로 하여금 안동땅 도산촌에 있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에게 글을 배우고 인격을 도야하도록 하였었답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부득히 가까운 안동 와룡마골이 우선 마음에 드셨던 모양이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민심이 너무도 흉흉하고 벼슬아치들은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나뉘어 다투던 시기라 말세의 징후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여 드디어 1592년 임진년에 희대의 큰 난리가 났으니 이를 임진왜란이라 하지요! 이때에 사시던 우리 조상님들은 주로 별좌공 할아버지의 손자 되시는 유愈,희熹,응應 삼형제분이시고 모두 교위공 위자.수자할아버지의 아드님이시며 모두 퇴계 이황의 고명하신 제자로서 당대에 추앙 받는 손꼽히는 엘리트였습니다. 당시 퇴계를 따르던 시대의 엘리트 가운데는 임진왜란을 선두에서 수습한 서애 유성룡[柳成龍], 약포 정탁[鄭琢],의병을 모아 영남을 지킨 조호익[曺好益]등등 기개 높은 선비도 많이 있었습니다.여기 조호익이라는 분은 호를 지산[芝山]이며 임진란 전에 솔무덤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고 "조씨 형제가 부지런하여 조[稠]천석을 생산하여 부자가 되었다"는 일화도 솔무덤이의 설화도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매촌공[梅村公] 유愈자할아버지는 조정으로부터 여러 번 추천을 받고 일찌기 태천군수를 역임하시고 여러 포상도 받으셨으며 이조좌랑을 지내셨으나 연세가 높아 한때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시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이미 72세의 높은 연세에도 불구하시고 스스로 용궁현감을 맡아 왜군을 물리치셨고 그후 다시 예천수성장[醴泉守成將]이 되어 의병을 모아 예천읍 뒷산 흑응산성[黑鷹山城]에서 왜병을 토멸하시며 고을을 두해동안 지키셨습니다. 기세좋게 북진하던 왜적들이 차츰 세력에 밀리여 남쪽으로 쫏기며 굼주린 패잔병이 이 예천성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니 마침내 전 성민이 끝까지 항쟁하다가 함께 한사람도 남지 않고 자폭하였는데 매촌공할아버지도 이때에 열세분의 자녀및 손자와 같이 성루에 올라서서 현재 예천읍에서 바라보이는 성곽모양의 벼랑으로 뛰어내려 적의 칼날아래 몹을 더렵히지 않으시려고 의연히 자결[自決]하셨다 전합니다. 지금은 예천읍이지만 당시에는 깊은 물이 흐르는 쏘[沼]였으며 일기당천의 요세이나 너무나 적은 군사로서 아귀 같은 왜군들의 집요한 공격앞에 장렬하게 생을 마치셨다 합니다.이후 동생 되시는 눌헌공[訥軒公] 응應자 할아버지께서 난리가 끝난 뒤에 그 뒤를 수습 하시여 지금 예천호명[범우리]에 묘를 세워 주시고 오늘까지 함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만 족보에도 모두 후예가 없는 상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 비운의 씨족 역사가 있고부터 우리 별좌공혈족들은 더욱 이 고을을 떠 날 수 없었으며 피가 끓는 의기를 숨쉬며 무려 400년을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랍니다.예천성을 지나면서 흑응산성을 올려다 볼때마다 우리 별좌공파 혈손이라면 가히 피가 솟구쳐 흐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충혈을 뿌린 신성한 터이며 아직도 올바르게 기록이 되지못하고 중국의 장군이 축성을 하였다는 등의 사대주의적 헛소리를 늘여 놓고 있음을 볼때 가슴이 아프답니다. 이 기록을 더듬어서 제가 약 30년전 1969년경에 발표한 신문자료가 있습니다만 개으른 학자들에 의하여 아직도 예천읍지[醴泉邑志]에조차 이를 수정하지 않고 있답니다. 다음 율리공[栗里公] 희熹자 할아버지는 일찍이 벼슬을 맡으셨는데 과거시험에 합격되어 첨정[僉正]벼슬에 계시는 중,임진란을 만나 임금 선조를 호위하시다가 지금 연천군에서 왜적들에게 해를 입고 돌아가셨는데 눌헌공 할아버지께서 형님이 되시는 이 율리공할아버지의 묘를 지금의 범우리에 모셨답니다. 안타까운 것은 매촌공과 율리공 두 형제분의 자손이 전란으로 말미암아 한분도 살아 남으시지 못하시고 돌아 가셨는데 그 자손이 없어 지금도 해가 되면 함께 모시는 형편입니다. 그후 아우이신 눌헌공 응應자할아버지께서 아드님 덕자.승자[德升]을 양자를 보내셨지만 지금 그 자손이 전하지 못하고 있으며 율리공에게는 삼척공파에서 그렇게 하려고 했다가 그쪽도 사정이 마찬가지였던지 취소되는 바람에 지금까지 족보에 자손이 전하여 오지 않습니다.혹 그 후손이라 하면서 말을 걸어 오드라도 사실과 다른 조작일 수 있으니 별좌공파 혈손이라면 이점을 능히 알아 차리시고 마땅히 거절하거나 꾸짖어 앞으로 이런 짓을 못하게 혼내 주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우리 별좌공파가 어떻게 하여 이 솔무덤이 사고막골에 자리에서 맡아 살게 되었는가를 대충 말씀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촌공 유愈 자 할아버지와 율리공 희熹자 할아버지께서 당시에 이미 수백년 훗날을 미리 기약하시고 현재의 영남명문대가[嶺南名門大家]의 조상님들과 깊은 약속을 하여두신 기록이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 하나는 매촌공[梅村公]께서 앞장서 주선하신 강친계[講親契]이며, 또 다른 하나는 율리공[栗里公]께서 주선하신 병명계[屛銘契]인데, 강친계는 당시 동복[同腹]사촌간이 되시는 수물하나의 어른분들의 모임이신데 혼상질병상구[婚喪疾病相救]를 목적하고 비록 멀리 해여져 있다 하더라도 봄가을과 정초에는 반드시 만나서 우애를 더욱 돈독히 하고 자손만대에 영원한 약속으로 하자는 내용으로 병진시월 초 닷세날에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당시 병진년이면 매촌공이 36세이시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6년전인 1556년이였습니다. 이분들의 휘諱를 아래에 적습니다.[연세순] 李 愈,鄭元忠,玄 璞,姜士弼,邊克寧,鄭元沆,金 璘, 李 熹, 鄭元默,李景欽,曹繼益,李 應,權景龍,鄭元健, 曹光益,洪秀民,曹希益,李安道,曹好益,權景老,曹兼益 이상 수물 한분으로 이분들끼리는 성종때의 명신[名臣] 연복군[張 延福君= 末孫]을 외조부로 하는 이종[姨從]간 또는 이종매부[姨從妹夫]간이셨습니다. 비록 숫한 전란을 거치고 많은 세월이 지나 그 자손이 어디에 흩어져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해도 당시 이 어른분들의 돈독하신 만남은 장차 리들이 영남에서 여러 대가문호와의 교유를 더욱 따뜻하게 하여줄 바탕이 되어 주실 것이외다. 다음으로 병명계[屛銘契]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시대적 혼탁이 극도에 이르고 있을때 젊은 당시 엘리트 여덟분이 함께 뜻을 같이 하여 나라를 구해 보려는 의지로 오율연귀[五律聯句]시를 지어 병풍에 글을 올리고 이를 각기 하나씩 만들어 가지시며 깊은 약속을 이루신바 기록을 보건데 충절넘친 역사를 읽는것 같았습니다. 참여하신 여덟분은, 任百英,柳希規,李 熹[栗里公],沈源河.崔 濂,閔 善,朴以龍,柳希緖 어른분들이 십니다.좋은 글들을 남기시고 가셨건만 그 자손들은 이를 잊고 지냅니다. 많은 글과 상세한 기록이 있습니다만 때가 되면 다음 후속편에 별좌공족보와 함께
싣겠습니다. 종친[宗親] 여러분! 항상 건강하십시요. 延 松 會 會長 觀 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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