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이씨에 대하여       앞으로

조선땅 황해도 연안(延安)


  
연안(延安)은 황해도(黃海道)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동음홀(冬音忽) 또는 고
염성(鼓鹽城)이라 부르다가 신라시대(新羅時代)에 해고군(海皐郡), 고려(高麗)에서는  염주(鹽州)·
영응현(永膺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溫州) 등으로 고쳐 불렀고, 충선왕(忠宣王 : 제 26
대 왕, 재위기간 : 1309 ∼ 1314) 때 연안부(延安府)로 고쳤다.  1895년 군(郡)이 되었으며,1914년
백천군(白川郡)과 합하여 연백군(延白郡)이  되었다.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시조(始祖) 이 무(李
茂)는 본래 당(唐)나라 출신으로, 고종(高宗 : 당나라 제 3대 왕, 재위기간 : 650  ∼ 683) 때 중랑
장(中郞將)을 지내다가 660년(신라 태종무열왕 7) 나당(羅唐) 연합군 대총관 소정방(蘇定方)의  부
장(副將)이 되어 신라에 들어와  백제(百濟)를 평정(平定)하는데 공(功)을  세워 연안후(延安侯)에
봉해졌고, 그 후 신라에 귀화하여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연안(延安) 땅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고
정확한 계대(系代)를 알지 못하여 후손들은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습홍(襲洪), 판소부감공파
(判少府監公派) 현려(賢呂),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원주(元柱),  통례문사공파(通禮門使公派) 지
(漬),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핵(核),  이부시랑공파(吏部侍郞公派) 분양(汾陽),  전법판서공파
(典法判書公派) 방(昉), 밀직부사공파(密直副使公派) 득량(得良), 판도정량공파(版圖正郞公派) 백연(伯衍), 영광군사공파(靈光郡事公派) 계연(季衍)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각각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습홍(襲洪)
의 현손(玄孫)으로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던 정공(靖恭)의 아들 원발(元發)이 고려 말(高麗末)에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냈는데, 고려의 국운(國運)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하여  이태조(李太祖)가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상신(相臣)으로 불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으며,  

그의 아 들 귀령(貴齡)과 귀산(貴山)이 세종(世宗)  때 좌의정(左議政)과 관찰사(觀察使)를  각각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춘천 도호부사(春川都護府使)를  지낸 속(續 : 관찰 사 귀산의 아들)은 조선 초에 맹인(盲人)들의 궁중나들이를 금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맹인의 원한을 샀다. 그 후 태종(太宗)이 속(續)의 넷째 아들  근수(根粹)를 부마(駙馬)로 삼기위해 맹인 지화 (池和)를 중매인으로 보냈는데, 그 원한으로써 무고로 모함을  하여 근수는 죄를 입고 창원(昌原) 으로 귀양을 갔었다.

직제학(直提學) 말(귀산의 현손, 인문의 아들)의 손자  주(澍)는 명종(明宗)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이  되어 문정왕후(文定王后 : 중종의  계비, 명종의 어머니)가 증(僧) 보우(普雨)를  총애하고 불교(佛敎)를 재흥시키자 여러  유생과 함께 보우의 처벌을 상소하여 크게 파문을 일으켰으며,  

선조(宣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과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지냈다. 주(澍)의  아들 광정(光庭)은 선조 때 증광문과(增廣 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 왔으며,

호성  2등공신(扈聖二等功臣)에 책록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가 부원군(府院君)에 진봉,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팔정문

오랫동안  어머니 병간호에 몸이 몹시 상했던 지남은 마침내 피를 토하다가 나이 49세때 세상을 떠났다. 지남의 아들 기직(基稷)이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상중에 물과 미음을 입에  대지 못하다가 머리털이 희어지고 눈물에  젖어 눈언저리가 썩기까지 하였다.  다음해 봄에 곡(哭)을 하던 중 숨이 막혀 쓰러져서 아우 기설(基卨)에게 "나의 불효로 친상을 마치지  못하니 부업(父業)을 계승해  달라"고 유언하고 <중용(中庸)>에  있는 선(善)을 택한다(擇善)는 귀절의 뜻으로써 간곡히 부탁하고 죽었다. 기직의 아우 기설도 부친상에 7
일 동안 단식을 하였고, 눈물이 다하자 불그스레한  혈루(血淚)가 나왔다고 한다. 그가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발인(發引)하여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화적(火賊)떼가 왔다가 영구(靈柩)를 지키고 울부짖는 기설의 모습을 보고 그 효성에  감격하여 돌아갔으며, 적성(積城)에서 상여에 불이 나자 몸으로 관을 가려 머리털이 모두 그슬렸으나 다행이 죽음을 면했다.
기설의 아들 돈오(惇五)와 돈서(惇敍)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江華島)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했다. 이로써 지남과 그의 처 정씨(鄭氏), 지남의 아들 기직과 기설의 형제, 딸 이씨, 지남의 손자 돈오와 돈서, 돈서의 처 김씨 등 8개의 정문(旌門)이 내려져서 <연안  이씨 8홍문>의 영예를 얻었으며, 기설의 손자 후정(後定)은 숙종(肅宗)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의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용납되지 않으므로 격분하여 죽었다.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충신(忠臣) 정려가
내려져서 대를 이어 가문을 빛냈다. 연안 이씨의 또 다른 인맥인  판소부감공파(判少府監公派) 현려(賢呂)의 후손에서는 9세 손 석형(石亨)이  뛰어났다

 

조선 제일의 문형(文衡)

일찍이 그의 아버지 회림(懷林)이  늦도록 아들이 없어서 삼각산(三角山) 신령에게 빌어서 잉태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마침 금성(禁省)에서 숙직을 하다가 꿈에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았더니 흰 용(龍)이 바위를 쪼개고 나왔었다.  꿈에서 깨 어나 아들을 낳았다는 기별이 왔으므로 아들 이름을 석형(石亨)이라 하였다고 한다.  나이 26세에 생원·진사와 문과 초시(初試)에 모두 장원하였고, 다음해 잇달아 삼장(三場)에 장원하여 정언(正言)을 지내고,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아  한성부윤(漢城府尹)·호조 참판(戶曹參判)·판한성부사 (判漢城府事) 등을 지낸  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좌리4등공신(佐理四等功臣)으로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석형(石亨)의  현손(玄孫) 월사(月沙) 정귀(廷龜)는 6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쳐 신동(神童)으로 일컬어졌고, 윤근수(尹根壽)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590년(선조 23)에 증광문과에 급제했으며,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인조(仁祖) 초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했던 그는 외교에도 재치와 수완이 뛰어나 여러 차례에  걸쳐 사신(使臣)으로 중국을 다녀왔으며,  명(明)나라 문사들의 청에 의해 1백 여 장(章)의 기행문을 모은 <조천기행록(朝天紀行錄)>을 간행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글씨에도 뛰어나 신  흠(申  欽)·장  유(張  維)·이  식(李  植) 등과 함께 조선중기의 4대  문
장가로 일컬어졌고, 그의 아들 명한(明漢 : 이조 판서와 대제학을 지냄)과 소한(昭漢  : 이조 참판
을 지냄) 형제가 유명했다. 인격(人格)과  시재(詩才)·효행(孝行)의 삼절(三絶)로 불리웠던  명한
은 10세 때 <월교교(月皎皎)>란  시(詩)를 지어 오봉(五峰)  이호민(李好閔)과 오산(五山) 차천로
(車天輅) 등 명시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궁성농추사(宮聲弄秋思)>란  글제로 짓게한 <월교교>를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조선 제일의 청백리(淸白吏)

달빛이 산창에  희게 밝으니, 돌 누각이 가을의 생각을 움직이네(動石樓之秋思), 청려장(靑黎杖)을 짚고 긴 파람하는데(植藜杖而長嘯), 사립문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쳐있네(人有影於柴扉)> 그가 저술한 시문(詩文)을 병자호란 때 잃어버렸는데 어떤 군사가 물가에서 주었다가  10년 뒤에 돌려주었기 때문에 문집  9권이 전해졌다. 특히 그는 효행(孝行)도 뛰어났다.

병자호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에 들어간 지 수일 만에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여, 호군을 피해다니다가 길 곁에 흙 집이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를 그 속에 모시고 자신은 문 앞에 누워서 몸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청나라 군사가 활줄을 당겨 한참 보더니 흙집 안에 노모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효행에 감동하여 그낭 돌아갔다.  

명한(明漢)의 아들단상(端相)은 인조(仁祖)때 정시문과에 급제하고 효종조(孝宗朝)에 사가독서를 했으며, 대간(臺諫)을 거쳐 청풍 부사(淸風府使)와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고, 학문이 뛰어나 <대학집람(大學集覽)><사례비요(四禮備要)>·<성현통기(聖賢通紀)> 등의 명저(名著)를 남겨 한국유학사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단상의 아우 가상(嘉相)도 효행이 뛰어나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어머니를 찾아 적진 속을 헤매다가 여섯 번이나 적에게 잡혀 끝내 살해당했으며,

조부(祖父) 월사(月沙), 아버지 명한(明漢)과 더불어 <삼대 대제학(三代大提學)>의 전통을 세웠던 일상(一相)은  청(淸)나라 실정을 보고하여 효종(孝宗)의 북벌계획 수립에 도움을 주었고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영릉지장(寧陵誌狀)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삼도 선유관(三道宣諭官)으로 류성룡(柳成龍)을 도왔던 귀(貴)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호위대장(扈衛大將)으로  공을 세워 정사1등공신(靖社一等功臣)에 올라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이 괄(李 适)의 난과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난세에 살면서 훈공을 세웠던 충신으로 유명했다.

귀(貴)의  아들 시백 (時白)은 효종(孝宗) 때 좌의정으로 .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진봉되고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명망을 떨쳐 연안 이씨 가문을 중흥시켰다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

그의 아버지 귀(貴)의 충정에 보답하는  뜻에서 임금이 내린 집에서 살았던 시백(時白)은 마당에 전부터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는 유명한 꽃나무가 있었다. 어느날 시백이 하직(下職)에 있을 때  대전별감(大殿別監)이 일꾼을 데리고 와서 왕명 이라 하면서 그 꽃나무를 캐어가려 했다. 시백은 아무말 없이 꽃나무 곁으로 달려가 뿌리까지 뽑아 버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아침 저녁으로 험악해져  가는데 임금께서 어진 인재를 구하지 않고 이 꽃을 구하시니 어찌 하시려는건가.  내 차마 이 꽃으로 임금에게 아첨하여서 나라가 망함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의 기개에 느낀 바 있었던 임금은 시백을 중용(重用)하였다고 한다.  시백이 병자호란 직후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가는데 평양 대동문을 들어서니 화려한 기생의 무리가 접대를 하였다. 병란 후에 서도(西道)에 탕진이 혹심한데 이   화려한 접대에 놀라 그 사유를 평양 서윤(平壤庶尹)에게 물었다. 그 서윤은 사신행차에 항상 체통을 못이루고 있어 각 고을의 관비(官婢)중 자색있는 자를 선발하여 모이게 하고, 그 복색과  비용은 그들 친족으로 하여금 부담케 함으로써 관비의 손실을 절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시백은 성내어 "서윤을 설치한 건 백성을 사랑하기 위함인가 사신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하기 위함인가"하며 호통을 치고는 감사를 불러 시정을 명하고 떠났다. 어느날  시백의 부인이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무명방석 하나를 만든 일이 있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시백은 퇴청 후 뜰  아래 부들자리(蒲席)를 깔게 하고 부인을 청하여 함께 앉아 말하기를 "우리 선조가 옛날부터 깔던  자리는 바로 이 부들자리요, 내가 풍운을 만나 외람되게 공경(公卿)에 올랐으나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여겨지며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어찌 사치로서 망하기를 재촉하단 말이오"하자 부인은 당장에 그 비단실을 뜯어버렸다는 기록이 <공사견문(公私見聞)>에 전한다.>

 

문무겸전(文武兼全)

만년에  효종(孝宗)이 왕세자와 시백을 불러 잔치를 베풀고 세자에게  이르기를 "이이를 보기를  너의  팔다리(股肱)처럼 여기고 위하기를 나같이 하라"고 유언하였다. 일찍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시백의 인품을 평하기를 "그를 알면 그를 믿지 않고 또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정말 묘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시백의 아우 시방(時昉)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아버지와 함께  공(功)을 세워 정사2등공신으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졌고, 연성부원군 석형(石亨)의 후손 시직(時稷)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국운을 통탄하고 유서를 남긴 후 종으로  하여금 목을 조르게 하여 자결했다.  통례문사공파(通禮門使公派) 지(漬)의 후손에서는 그의 현손(玄孫) 보정(補丁 :  예조 참판을 역임)과  말정(末丁 :  예빈시 소윤을 역임) 형제가 뛰어났고, 말정의 아들 숙기(淑琦 : 이조  판서)와 숙함 형제는 이시애(李施愛)의 난과 건주위(建州衛) 정벌에 유공했다. 명종(明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던 후백(後白 : 숙함의 증손, 국형의 아들)은 옳은 일과 결백함을 지나치게 고집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연안군(延安君) 숙기(淑琦)의 증손 호민(好閔)은  선조(宣祖)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호성2등공신(扈聖二等功臣)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고, 이어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특히 그는 검소하기로 유명하여 그토록 오랫동안 관직에 있으면서도  비단옷 한 번 입지 않았다. 선조가 어의(御衣)를 하사(下賜)할 때도 호민에게만은 무명옷을  내렸다고 한다. 전란이 끝날  때마다 서로 녹훈(錄勳)을 하려고 위증을 해가며 법석대기 마련이다.  임진왜란 후에도 왠일인지  녹권을  받은 자가 조정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다. 이에 무관심한 호민에게 이덕형(李德馨)이  희롱하며  "공은 어디 갔다가 정승이 되지 못했소"하였더니, 호민은 "공은 어디 갔다가 공신이 되지 못했소"하였다. 그후 이 아름다운 대화는 전후 때마다 일어나는  시대의  풍조를 익살하는 명귀로  곧잘 인용되었다고 한다.

 

빼어난 근대인물 李道再  李東寧

정조(正朝) 때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지낸  정운(鼎運)의  아들 명적(明迪)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으며, 김해 부사(金海府使) 중길(中吉)의 손자 술원(述源)은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정희량(鄭希亮)에게 죽음을 당했다.

문무(文武)를 겸비했던 술원은  거창읍의 좌수(座首)로 있다가 의병(義兵)을 일으켜 역장(逆將) 정희랑 앞에 나아가 "너의 조상은 그토록 나라에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뭣이 모자라 이런 수작이냐. 너의 선조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고 호통치다가 무참하게 난도(亂刀)질 당했다.

술원의 아들 우방(遇芳)이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고 우두령(牛頭嶺)에  올라가 적 틈에 잡혀 있는 거창 시민에게 포고를 하였다. "거창군민은 나의  말을 들어라. 역적 희량에게 붙어 있으면 죽을 날이 멀지 않을 것이요, 희량을 잡아 오진(吾陳)에 데려오면 조정에  품하여 녹훈을 할 것이다." 군민들이 밤중에 정희량의 거소를 습격하여 회량을 묶어 우방의 진용에 데려오자 난이 평정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판서(判書) 시원(始源)의 아들 봉수(鳳秀)가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정조(正祖)로부터 <근사록(近思錄)>을 하사받고 권학(勸學)의 격려를 받았으며, 참봉 명원(命源)의 아들 지수(趾秀)는 순조(純祖) 때 서연관(書筵官)으로 세자(世子)에게 학문을 진강했다.

또한 <삼조보감(三朝寶鑑)>의 찬집당상(纂輯堂上)을 지내고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던 약우(若愚), 석농체(石農體)의 독특한 필체를 이루었던 종우(鐘愚),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자결한 현섭(鉉燮),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서양의약 교육기관을 세우게 했던 도재(道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매국 5적신(五賊臣)의 처형을 상소했던 설 등이 명문(名門)의 전통을 이었으며, 동녕(東寧)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조약폐기운동을 전개했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
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을 겸한 후 대통령 대리가 되어 의절(義節)의 전통가문인 연안 이씨를 더
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안 이씨는   남한에 총 30,274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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