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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전설: "조천석" 이야기                                 2244 이관희
 

내가 방바닥을 겨우 기어다닐 만 할 어린 나이 때 칭얼거리기만 하여도 할머니등에 엎혀서 지내는 일이 많았고 그럴 때에는 숫한 자장가도 듣지만 많은 이야기도 듣게 된다. 
예천군 호명면 송곡동 365번지 큰 홰나무가 앞에 서 있던 큰 대문집이 달린 집 한지붕 아래에서 4대가 한마당에서 지냈다. 대가족이 함께하는 가운데 종조모님이 두분과 양조모님등 할머님이 네분이 계셨는데 이분들의 온 갖 귀여움을 받아가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때에 들은 이야기는 아직도 내머릿속에 주렁주렁 열려 있다.
지금도 내 귓가를 스치는 바람결에 들려 오는 어슴푸레한 옛이야기 대목대목들이 끊어졌다 이어지고 다시 이어지다 아스라히 살아지려고 할 때면 나는 곧장 볼펜을 들고 종이를 찾곤 한다."청화산 도둑굴","오룡골 거머리" ,"샘골의 현제수-顯濟水"등도 다 이때에 들어 모아둔 이야기들이다. 이중에는 사실인 것 도 있다.
그 가운데 "조 천석 이야기" 는 내가 청년시절을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 아 보는 동안 가끔 뇌리를 스쳐 작으나마 용기를 주고 좋은 교훈을 안겨준 이야기 중 하나이다.
옛날 이야기가 주로 도덕적 성격을 띤 내용이 대부분이여서 유고적 상류사회의 풍조를 읽어 풍기게하지만 이 이야기는 다소 도덕적인 부분도 가미 되지만 주 내용은 재산을 모으는 이의 이야기로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 한 사람의 피나는 노력의 모습을 엮고 그 결실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내용이라서 경제관념을 포함한 매우 교훈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 사람이 재산을 모은 방법이 조(粟)를 잘 가꾸어 무려 천석을 거두었다는 의미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인데 본래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다른 여러 가지 일 중에 조를 앞세운 것은 그의 성이 조(曺. 또는 趙)씨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고 이 마을에 500여년 전까지 조(曺)씨가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아마 그의 성이 조(曺)씨의 조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으며 그 조씨의 조상이 열심히일해서 자수성가한 방법을 자손들에게 전래하다 보니 이야기로 남게 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솔무듬에서 살았고 솔무듬 구룸재밭가 산밑에 집을 지어 살았는데 아직도 그 언덕배기에는 불그름에 탄 흔적이 남은 팽나무등걸이 뭍혀 있으며 샘이 있었던 자리가 있어 가물이 되어도 그 자리에서는 물기가 오래도록 남아 거곳에 심어저 있던 보리싹은 늘 푸르청청하였었다.
그는 늘 망태를 메고다녔으며 동네앞에 개똥이나 소똥을 줍고 심지어는 산속에 올라가 짐승들이 두고간 오물들을 거두어 망태에 담아 날라 집앞 밭 이랑에다 묻고 또 뭍기를 끊이지 않고 일하여 해마다 얻는 수확이 적지 않았는데 주로 조(粟)를 심어 왔다고 한다.
 
조(粟)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반드시 밭에서 재배한다. 높이 1∼1.5m이고 가지를 치지 않는다. 잎은 바소꼴이고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으며 밑부분이 잎집[葉齧]으로 된다. 잎혀는 가는 털이 밀생한다.

    꽃 이삭은 길이 15∼20cm로서 한쪽으로 굽고 짧은 가지가 많이 갈라져서 꽃이 밀착한다.
    조의 원산지는 동부 아시아이며 그 원형(原型)은 강아지풀(S. viridis)이다.
    조는 고대부터 재배되었으며, 중국에서는 BC 2700년에 이미 5곡(五穀)의 하나였다.
    한국에서는 옛날부터 구황작물(救荒作物)로서 중요시되어 왔으며 가뭄을 타기 쉬운 산간지대에서는 밭벼 대신 재배된다. 조가 세계적인 작물은 못되지만 한국에서는 옛날부터 전국적으로 재배해 온 작물로서 이땅에 보리가 있기 전부터 재배되어 왔으나 요즈음에는 식생활이 바뀌면서 극히 적은 면적에서 재배되고 있다. 조의 분류와 품종을 살펴보면 봄에 뿌리는 봄조와 여름에 뿌리는 그루조로 구분된다.

    씨앗의 성질에 따라 차조와 메조로 나뉜다.
    한국에서는 남부지방에서는 일본종, 북부지방에서 중국 전래 품종이 다소 재배되나 전국 재배 품종은 한국 재래품종이 주를 이룬다. 조의 재배환경은 온난건조를 좋아하며 다소 가뭄이나 저온에도 잘 견딘다.
    발아의 적온은 30∼31℃이다.
     
쌀이나 보리와 함께 주식의 혼반용으로 이용되며 엿·떡·소주 및 견사용의 풀, 새의 사료 등으로 이용된다. 그러나 전쟁을 겪는 그 당시는 이 조가 거의 빈부를 따지지 않고서리도 대개는 이를 주식으로 하였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봄 가을로 재배한 조(粟)를 거둬 들이는 수확이 늘어나게 되자 당시 소문으로서는 막대한 량을 상상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얻게된 이름이 "조 천석"이었다는 것인데 천석이란 곡식의 계량 단위로 두가마니의 량을 말한다. 여하간 엄청난 수량의 조를 해마다 거둬 들이는 모습에서 그의 이름이 불려 지게 된 것 같다.
지금도 그의 생활 흔적이 솔무듬 마을 곳곳에 남아 있고 보면 이 전설은 어찌 보면 실화일 가능성도 없지 않고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돈을 모아자수성거한 부자도 많이 있어 우리 마을에서만 전해오던 것이여서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여덟살적에 학교입학을 하려고 도시로 갔고 6.25 한국전쟁이 이러나던 때 다시 마을로 찾아 들어 피란을 하고 다시 두 해 가까히 살게 되었는데 이때에 구름재 밭을 내 이름으로 등기하여 주셔서 처음으로 그 밭에다가 조(粟)를 심어 가꿔 본 일이 있었다.
고랑을 깊게 파고 두둑을 높이 한 다음에 씨를 뿌려 살짝 묻어 두면 수일 후에 싹이 돋는데 이대에 함께 올라 오는 잡초가 더 돋보이기 때문에 간혹 잘못 하다가는 잡초는 남기고 조 싹을 모두 뽑아 버리는 실 수를 하는 경우도 업시 않다.
가장 더운 여름에 조밭을 메는 일은 참으로 고된 일 중 하나다.
두 무릎을 맛대고 쪼그리고 앉아 이랑을 타고 가며 밭을 매어 보면 앞에 보이는 남아있는 이랑은 더욱 많아 보이고 지금까지 메어 온 이랑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아서 더욱 지루하고 힘들어 보이기 때문에 때로는 뒤돌아 앉아서 메어 보곤 하지만 누가 말하길 "조밭매던 새색씨 호미두고 달아난다"는 속담도 있였다.
 
내가 조밭을 매어 본 다음에 소출은 적고 일은 너무 고된 남어지 생각한 것이 봄에는 감자를 경작하고 여름에 거둬들인 다음에 늦 여름 막받이에 경상도 사투리로 메물을 갈았는데 메물은 밭 이랑도 궂이 만들 일도 없고 매번 밭을 메어 주는 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곳식 가꾸는 것 보다 힘들지 않으므로 나는 그사이 책도 보고 숙제도 할 수 있었다.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메밀은 각지에서 재배하는 식물인데 높이는 60∼90cm이고 줄기 속은 비어 있으며 뿌리는 천근성이나 원뿌리는 90∼120cm에 달하여 가뭄에 강하다. 잎은 원줄기 아래쪽 1∼3마디는 마주나지만 그 위의 마디에서는 어긋난다. 꽃은 백색이고 7∼10월에 무한꽃차례로 무리지어 피며 꽃에는 꿀이 많아 벌꿀의 밀원이 되고 타가수정을 주로 한다. 수술은 8∼9개이며 암술은 1개이다.

 

메밀꽃은 같은 품종이라도 암술이 길고 수술이 짧은 장주화(長柱花)와 암술이 짧고 수술이 긴 단주화가 거의 반반씩 생기는데 이것을 이형예현상(異型衲現象)이라고 한다. 열매는 성숙하면 갈색 또는 암갈색을 띠며 모양은 세모다. 중국 북동부와 시베리아 등지에서 재배종과 형태가 거의 같은 야생종이 발견되어 이것이 재배종 메밀의 원형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어, 원산지는 야생종이 발견된 지역인 바이칼호() ·중국 북동부·아무르강() 일대를 중심으로 한 동부 아시아의 북부 및 중앙 아시아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은 당나라 때 처음 알려졌으며 송나라 때에는 널리 재배되었다.

한국도 원산지와 가까우므로 중국을 거쳐 오래 전부터 재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메밀은 건조한 땅에서도 싹이 잘 트고 생육기간이 60∼100일로 짧으며 불량환경에 적응하는 힘이 특히 강하다. 서늘하고 알맞게 비가 내리는 지역에서 자라는데, 생육 초기에는 온화하고, 개화 성숙기에는 고온이 아니며 비가 적은 조건이 좋다.

생육기간이 짧고 기후에 대한 적응력이 강하므로 북위 70 °까지 중점토를 제외한 어디에서나 재배할 수 있어 그 재배 범위가 매우 넓다. 종류에는 이른 씨뿌림(早播)에 적응하는 여름메밀, 늦은 씨뿌림(晩播)에 적응하는 가을메밀, 그리고 그 중간 성질을 가진 중간형으로 구별된다. 풋것은 베어 사료로 쓰며, 잎은 채소로도 이용된다. 종자의 열매는 메밀쌀을 만들어 밥을 지어 먹기도 하는데, 녹말작물이면서도 단백질 함량이 높고 비타민 B1 ·B2, 니코틴산 등을 함유하여 영양가와 밥맛이 좋다. 가루는 메밀묵이나 면을 만드는 원료가 되어 한국에서는 옛날부터 메밀묵과 냉면을 즐겨 먹었다. 섬유소 함량이 높고 루틴(rutin)이 들어 있어서 구충제나 혈압강하제로 쓰이는데,

오늘날에는 이 "루틴"이라는 약제를 생산할 목적으로 대량 재배한다.

학교는 예천읍내에 있는 예천중학을 다녔는데 호명에서 새벽일쯕 어두 컴컴한 시간에 이십리가넘는 길을 재촉하여 달리면 선몽대 강을 건너고 오백재 고개를 넘어 가까스로 학교에 도착하여 지각을 모면한 것이 다행으로 생각하며 지냈다.
전쟁으로 학기는 1년하고도 반을 넘어 다음해 9월 초에 시작하였다.
1학기말 전교생이 교당 앞에 정렬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것도 제일 먼저 내 이름을 불러 화들짝 놀라 보니 교단앞으로 나오란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개근상과 학업우등상을 받았다.
 

가을에 무려 1000평 가까운 밭에서 거둬들인 경상도 사투리로 메물(메밀 또는 모밀)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이를 담아 둘 자루도 가마니도 주지 않아 두리뭉실 마구잡이로 마루 밑이나 처마밑에 빈자리만 있으면 쓸어 넣기도하고 담밑에 짚을 덮어 두기도 하지만 쥐나 새들도 메물은 축내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할아버님은 이런 잡곡이 섞이면 정곡(벼)에 홈이 가니 멀리하라고 마슴들에게도 단속하시면서 "개으른 놈이니 할 수 없다"고 나에게 꾸중을 일삼아 하셨다.
전쟁이 난 인 이해는 이북 평안도 사람들이 많이 피란 온 터라 갑자기 냉면이라는 음식과 만두가 유행되었는데 냉면을 만드는  주 재료가 메물이었던 모양이라 내가 메물을 메고 안동 구담장이나 호명 오천장엘 가서 자루를 내려 놓기 바쁘게 낚아 채 가는데 뒤딸아가보면 값을 "언어리"없이 달라는 값을 그대로 주었다. 그야말로 부르는게 메물 값이었다.
 
메물을 도매로 모으는 장사꾼에게 메물이 많이 있으니 사가겠느냐고 하였더니 두말 없이 따라나서는데 집에 와서 보고는 큰 자루를 트럭에 싣고 와서는 마루 밑과 담자락에 묻어 놓은 메물을 싺싺쓸어 갔다.
메물값은 그 떼나의기억으로는 쌀값에 버금할 정도로 후하게 처서 받았다고 기억하는데 이 돈은 모두 어머님께 마껴 두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보고 싶은 책도 사보고 월사금(봄 가을 두 번씩 납부)도 때마춰 주었다.
나는 중학교에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였는데 마침 대창고등학교가 새로 창설되면서 예천에도 비로소 인문계 고등학교가 생겨서 예천중학교와 같이있는 예천농업고등학교로 가지 않고 대창고등에 입학하였다.종조부되시는 읍장할배는 당시 대창고이사장으로 계셔서 새로창설된 학교에 학생을 유치하는 참이여서 학교 성적 1.2.3등에게는 장학금을 전액 지급한다는 솔깃한 매력에 그만 나도 학비가 비싸지만 공짜로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원하였으나 겨우 4등으로 합격되었다고 통보를 받게되어 마음이 저으기 부담이 되었다.
나는 1학년을 겨우 다닌 다음 1학년 진급에 앞서 대구로 다시 전학을 갔다.
"조천석"이야기가 곧 메물장수 이야기에서 다시 내 넉두리로 마치게 되어 관심을 두고 읽어 준 분들에게 미안스럽다.
그렇지만 조를  천석이나 지은 이 이야기에 이어 이 동네에서 또 메밀을 천석은 못되도 드물게 많이 지은 기이한 사람으로 나를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조천석 이야기는 조금씩 정리 되는대로 추가로 더 많이 부연하겠다.